Project Description
2012년 12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_ 이금희 홍보팀장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명품이라 부른다. 오랜 시간과 인내, 그리고 자기만의 고집이 없다면 ‘명품’을 만들 수 없다. 패션, 음악, 미술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서도 명품은 시대를 아우르는 조화로움 속에 존재한다. 명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우직하게 걷는 완고한 철학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랜 투자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GA의 불모지 대구 지역에 <프라임에셋>이란 깃발을 세운 이태윤 본부장. 경상도 사나이의 뚝심과 의리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대구 지역에 <프라임에셋>을 정착시킨 장본인.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렸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신의를 중시하는 명품 철학을 지닌 그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화려한 꿈을 품고, 보험영업 입성
기자가 간혹 방문하게 되는 대구사업단에서 그의 모습은 항상 긴장되어 있었다. 물론 사무실을 오가는 45본부 소속의 영업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기자가 바라보는 대구사업단의 미래는 밝았다. 회사의 분위기가 그 회사의 미래를 알려주듯 대구사업단의 분위기는 전문 금융그룹의 분위기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터뷰를 위하여 정식으로 기자와 마주한 이태윤 본부장. 그런데 그의 뜻밖의 이력이 기자를 놀라게 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 출신의 이색 경력의 소유자.
“졸업 후 취직을 했지만 편집디자인 초년생의 월 급여는 일찍 결혼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습니다. 전 항상 빨리 돈을 벌어 가정을 안정시키고 제가 원하는 명품 차를 타고 싶었습니다.”라며 인터뷰의 서두를 풀었다.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간결하고 멋진 곡선과 디자인적 화려함, 그리고 단단한 내구성은 그가 원하는 삶의 이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졸 연봉 3000만 원, 전세 값도 모자라 대구시 외곽에 신혼 집을 얻은 그에게 명품 차는 너무 먼 꿈이었으며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어느 날 대한생명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아내가 그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당신은 친구 관계도 좋고 인간성도 좋으니 보험영업을 해보는 것이 어때? 이번에 우리 회사에 KLD(Korea Life Division) 부서가 구성되는 데 그 곳에 한번 지원해봐요”
조심스런 제안이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에게 영업이라니… 자신감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당시 편집대행사에서 명함까지 디자인하며 매번 밤샘 작업을 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지속적으로 제안을 해왔다. 그냥 아내 부탁 한번 들어주자는 심정으로 대한생명 지점장을 만났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의 인생 행보는 달라졌다. 벤츠 SLK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그가 정말 타고 싶었던 명품 차를 바로 그 지점장이 타고 나온 것. 보험영업에 대한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그가 지점장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저 차는 어떻게 구입하셨어요? 보험 영업을 하면서 저 차를 구입하신 건가요? 내가 보험 영업을 시작해 1년 안에 그 차를 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시작하겠습니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터무니없는 질문이지만 그때는 벤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는 명품 차를 가질 수 있다는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험난한 보험영업의 길에 들어섰다.
절박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의 보험 여정은 선택만큼 쉽지 않았다. 컴퓨터 자판과 마우스로 멋진 레이아웃을 그려내던 감성적인 눈과 손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악수를 청해야 했고, 창조적인 감성으로 꽉 차있던 그의 뇌는 숫자에 민감해져야 했으며, 책상 밑에서 조용히 자세를 잡고 앉아있던 다리는 하루 수십 km를 달려야 하는 부지런함으로 단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집과 사무실 거리는 30Km 정도, 오전 6시 50분에 집에서 나와 사무실에 도착하면 7시 반, 텅 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날 영업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감성적 뇌가 발달한 자존심 강한 대구사나이에게 보험영업은 너무나 힘들고 거칠었다.
“거절과 무시가 계속되는 하루 하루였습니다. 보험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가족은 좀 다르겠지 하는 심정으로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대구에서 그의 누나가 근무하는 천안의 한 학교 앞까지 찾아가 보험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누나에게 맞을 만한 상품을 권유했다. 하지만 누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나한테 보험 가입시키려면 오지 마라” 였다. 가장 믿었던 가족이기에 상처는 더욱 깊었다. “가입을 적극 권유한 것도 아니고 현재 내가 영업인으로 자격이 있는지 테스트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정말 너무 한다 싶더라구요. 혹시나 하는 맘으로 다시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기존 계약을 다 깨고 저를 위해 보험을 다 바꾸는 겁니다”. 누나와 동생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태윤 본부장을 자극했다. 누나가 “그래 두고 봐라” 하는 각오를 다지게 해주었다면 동생은 오빠를 향한 조건 없는 믿음으로 다시금 영업맨 이태윤을 되돌아보게 했다. ”정말 오빠가 돼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눈물이 계속 흘렀다. 거절도 승낙도 당시 그에겐 고통이었다.
친구들은 더욱 냉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잘 다니던 사무실을 그만두고 전공도 다른 보험영업에 뛰어들었으니 친구들은 쉽게 그의 이직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연락 안 되는 친구들이 많아지고 시간이 쌓일수록 주변 지인들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더욱 스스로의 선택을 고민스럽게 했다.
3개월 째 거절만 당하니 오기가 생겼다. 매일 오전 평가 시간에는 칭찬보다 꾸중 듣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 너무 답답했던 이태윤 본부장은 당시 팀 매니저를 찾아가 물었다.
“형님 내가 RP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고 그저 영업을 하라 하면 어찌합니까? 무조건 외우기라도 할 테니 자료 좀 주세요” 절박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선택한 일에 대해 무언가 끝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랬더니 당시 영업 매니저는 메트라이프에서 나온 CD 한 장을 건넸다. 그 CD안에는 고객을 만나면 해야 할 말들과 영업 전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주일 만에 50분 분량의 내용을 토씨 하나 안 빼고 다 외웠다. 집에서 연습도 하고 몇 번의 연습 후 고객을 만났지만 결과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고객응대방법이 나온 CD 내용은 너무 멋졌는데 왜 계약이 안 나오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결국 다시 매니저를 찾아갔다.
“형님 왜 근데 계약이 안 나옵니까?” “그건 네가 100% 다 오픈 했기 때문이야. 고객은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을 얻고 나면 널 다시 만날 필요가 없어” 아차 싶었다. 영업도 연애처럼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필요하구나. 이후 조금씩 조금씩 계약이 이루어지고 결국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그는 월 평균 1000만원 이상을 받는 능력 있는 FC로 성장했다.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서울, 대전, 부산, 목포 등 지역과 상관없이 고객을 찾았다. 대부분 개척 영업이었기에 매일 매일이 전쟁터였다. 재무컨설팅은 기본, 고객이 원하는 조건과 서비스를 맞추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렇게 보험 시작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여동생의 소개로 문경에 위치한 병원을 소개받는 것이 성공의 큰 계기가 되었다. 병원 관계자의 소개로 직원들 대상으로 세미나 셀링을 하게 된 것. 일주일을 꼬박 연습해 병원 관계자들 앞에서 재테크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먼 친척분이었던 재단 이사장님의 소개로 병원 내에 부스를 설치해 연속 영업을 할 수 있었으니 매출은 계속적으로 오르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그의 수수료 또한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2006년 그는 보험영업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대한생명에서 연도대상을 받았다. 그렇게 1년 반, 구박하던 친구들은 이태윤 본부장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영업의 매력과 성공의 희열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좌측부터 하루 스케쥴을 검토하는 이태윤 본부장, 64본부 최석규 본부장과 함께
대구 <프라임에셋>의 첫 번째 주자
보험영업 1년 만에 그는 보험 영업 시작 전에 메모해 놓았던 모든 꿈을 이루었다. 외곽에 있던 집을 시내로 옮겨 이사할 수 있었고 부모님 해외여행과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명품 차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생명 2년 차부터는 이상하게 실적이 오르지 않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목적을 잃어버렸던 것 같아요. 제가 원하던 모든 꿈을 이루고 나니 기운이 좀 빠졌다고 할까? 대한생명에서는 관리를 해보라고 권유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만약 관리자가 된다면 대한생명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태윤 본부장은 차라리 이 참에 GA로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GA라면 출퇴근도 자유로울 것이고 상품도 다양하게 판매할 수 있으니 고객에게 맞춤 상품을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우연히도 영업4본부의 고원준 이사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타 GA는 좋은 조건부터 제시하는데 반해 고원준 이사는 처음부터 명확한 선을 그어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며 정확하게 정보를 주면서 말이죠.” 타 GA의 조건이 월등히 좋긴 했지만 고원준 이사가 보여준 명확한 태도와 신뢰는 이태윤 본부장을 끌어당겼다.
“이후 고이사와 함께 서울 광장동 본사에서 사장님을 만나고, 대전에 있는 <프라임에셋> 본부장들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와 신뢰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겁니다. 타인을 속일 수 없을 것 같은 사장님과 회사를 신뢰하는 본부장들의 모습 속에서 <프라임에셋>의 미래가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가 2008년이니 본부가 7개 정도밖에 없을 때였죠.”
그렇게 입사를 결정한 이태윤 본부장은 투명한 수수료 체계와 밸류체인 시스템을 통하여 인생의 승부수를 던져볼 만하다는 생각에 2년 전의 각오를 되살렸다.
좌측부터 김진우 지사장, 한혜미 사원, 이태윤 본부장, 서진호 지사장, 권태혁 FC, 전상호 FC
어려움은 극복의 대상
보수적인 대구에서 <프라임에셋>이 자리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구는 GA가 성장하기 가장 힘든 지역 중의 하나였다. 까다롭고 보수적인 대구지역 고객들은 GA보다 신뢰할 수 있는 대기업 원수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극히 보수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군들이 바로 대구스타일이다. 때문에 지난 2003년부터 에이플러스에셋, 유퍼스트 등 다양한 GA들이 대구지역을 섭력하겠다고 자리를 잡았었지만 모두 포기한 곳이 바로 대구였다. 그러나 2008년 3월, 소수의 동료들을 규합한 이태윤 본부장은 박창현 지사장과 함께 안심동 반야월의 작은 건물에서 <프라임에셋> 대구 시대를 시작한다. 공군 비행기가 지나가면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열악한 사무실 환경, 겨울은 춥고 여름은 너무 더운 자연 그대로의 온도를 온 몸으로 체험했지만 불평할 여유도 없었다.
“박창현 지사장과 함께 한달 10명씩 리쿠르팅 목표를 채워나갔습니다. 동료들과 오전에는 리쿠르팅 전단지 돌리고 오후에는 고객을 만나고 밤에는 다시 전략을 짜고 정신 없이 달렸지요. 지금 생각하면 배고픔과 열정 하나로 뛸 수 있었던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태윤 본부장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어려움은 극복의 대상이지 좌절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2년간 철저히 배웠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날, 고원준 이사가 지사를 방문했는데 난방 시설도 안 돼있는 사무실을 바라보며 ‘왜 이렇게 추워요?’ 라고 묻더니 조용히 나가서 난로 두 개를 사오는 겁니다. 얼마나 죄송하고 감사하던지… 당시 첫 달 20만원, 두 번째 달 30만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정말 배고픈 시절이었죠. 청약서를 이면지로 사용하다 컴플레인을 받은 적도 있답니다. 하하”
위기가 사람을 강하게 한다고 했던가. 원수사 때는 그래도 알만한 보험회사의 명함으로 영업을 하니 고객들의 신뢰는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GA는 달랐다. 개인영업도 중요하지만 리쿠르팅은 더 중요했다. 그리고 리쿠르팅을 위해서는 회사에 대한 PR이 필요했다. 이태윤 본부장은 <프라임에셋>의 전단지를 만들어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은 물론 자료가 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모아서 <프라임에셋> 홍보지를 만들었다. 그리곤 매일 원수사 건물을 돌기 시작한지 1년. 그렇게 <프라임에셋>은 서서히 대구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라임에셋>이 알려지는 동안 이태윤 본부장의 지갑은 더욱 얇아졌고 결국 그는 아내 몰래 자신의 결혼 패물과 자동차까지 팔아가며 사무실 임대료와 총무 급여를 맞춰가야 했다.
“사실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왜 없었겠어요. 다 아시겠지만 보험영업을 하다 보면 참 좋은 조건 제시하며 유혹하는 회사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매출도 없는 저희 지사를 매주 두 번씩 4시간 거리를 오가며 함께 전단지를 돌리시는 고이사님을 바라보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답니다. 그때는 정말 의리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이메일을 보내고 원수사 빌딩을 돌았지만 대구시장에 <프라임에셋>이 들어선지 1년이 지나도 대부분의 설계사들은 <프라임에셋>에 관심이 없었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프라임에셋>의 밸류체인 시스템과 투명한 수수료 체계 등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이며 리쿠르팅 대상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6개월이 지나자 되돌아오는 대답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 <프라임에셋>? 나 들어봤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프라임에셋>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자동적으로 리쿠르팅도 되기 시작했죠. 이제는 사람들이 그럽니다. ‘아 너 <프라임에셋> 다니나? 좋은 데 다니네?’ 그렇게 알아봐 주는 것만도 얼마나 반갑던지… 그런 말 들으면 아직도 뿌듯합니다.”
대구, 제2사업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2011년 5월, 이태윤 본부장은 입사 3년 만에 드디어 본부장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그 해 10월, 회사는 지난 3년간 대구지역에서 <프라임에셋>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태윤 본부장의 노고를 치하라도 하듯 대구의 중심부인 시청 근처에 대구사업단을 오픈했다. 사업단이 개설되는 당일, 그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혔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이었을까. 상기된 얼굴로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겨본다.
“수 많은 GA들이 대구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너무 힘들고 외로운 투쟁이었지만 결국 사업단까지 개설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프라임에셋>에 관심 있어 하던 리쿠르팅 대상자들이 열악한 사무실 환경을 보곤 발길을 돌렸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멋진 사무실에서 증원을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라며 그 동안의 고생을 토해냈던 당시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제가 직급이 본부장이지만, 본부장이 일 안 해도 되는 시스템이 <프라임에셋>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라임에셋>은 FC부터 본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FC는 FC의 자리에서, 지사장은 지사장의 자리에서, 본부장은 본부장의 자리에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몫의 일이 있습니다.”
이태윤 본부장은 그 동안 본부 분할에 너무 주력한 나머지 리스크 관리를 소홀이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 도전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니 앞으로 풀어내면 그 뿐이다.
“성장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본부 분할과 더불어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다 보니 사실 리스크 관리에 좀더 힘을 쓰지 못한 저의 불찰이죠. 예상치 못한 손실이긴 하지만 맨손으로 대구시장에 <프라임에셋>을 세운 접니다. 이기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제 꿈은 대구 지역에 제2의 사업단을 오픈 하는 것이랍니다.”
어느 한 곳으로 치중하다 보면 균형이 깨지게 마련.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는 화려한 실적이나 높은 소득을 자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자랑하는 것이 있다. 항상 그랬듯이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르기를 준비하고 있는 도전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성공도 있고 때로는 실패도 있다. 결과가 어떻든 우리 인생은 속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며, 긴 호흡을 가지고 인생을 꾸려나갈 것이다.
2022년 현재
이태윤 본부장은 166본부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