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1년 4월 I 인터뷰 I 글 _ 이용지 기자 I 사진 _ 이금희 홍보팀장
신 차를 산지 1년 동안 6만 Km를 달린 사나이. 대전사업단에 베이스캠프를 둔 영업19본부의 고승기 본부장이다. <프라임에셋>과 함께라면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다고 웅변하는 사람. 전국 체인망을 갖고 있는 유통회사의 지역 대표였던 그가 <프라임에셋>과 함께하며 다시 한 번 쌓아 올리고 싶은 꿈은 무엇일까? 남들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며 더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고승기 본부장을 대전사업단에서 만났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겠다며 하늘을 감동시켰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 담겨 있는 교훈이 단지 우직한 성실함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이 사자성어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이상적인 경영 메커니즘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해내기 벅찬 일을 내 자식, 손자, 그리고 대를 이어가며 진행하게 한다는 우공의 사고를 <프라임에셋>에 적용시켜 본다면 어떨까? 선배들은 자신들의 영업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전문 인력들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에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승기 본부장의 행보는 우공이산의 전형을 보여준다. 후배들에게 자신이 가진 성공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해주고 그들에게 자신과 뜻을 함께해야 할 자발적 의지를 심어준다. 팀원들에게 바보 같다는 얘기를 들어가면서도 우직하게 자신을 쏟아부은 3년의 시간…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의지는 아래로 아래로 퍼져가며 드디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부정한 돈에 손대지 말거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나고 자란 고승기 본부장. 이 지역에 대형 스파가 들어서면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다들 돈을 벌었다는데, 그의 집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형이 모두 공무원이어서 가진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청렴함을 생명처럼 여겼던 아버지 때문에 시골에 살면서도 세를 전전했다는 고승기 본부장은 이런 일화를 털어놓았다.
“아버님이 나름 고위직 공무원이었는데 집에 가면 늘 포대 자루에 담긴 돈이 놓여있었어요. 아들 군대 빼달라고 가져온 돈이었는데 어려서 뭔지 잘 몰랐죠. 어머니한테 이 돈 내가 쓰면 안 되냐고 했다가 형한테 정말 심하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지요.”
부전자전이라, 현재 예산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고승기 본부장의 형 또한 성품을 짐작할만하다. 아버지는 늘 돈 포대를 보면서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돈을 돌려주러 가는 것이 나름 일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고승기 본부장 또한 그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직하고 곧은 사고를 갖게 되었다고.
학창시절 학교 성적이 좋았던 그는 당시 상위권 학생들만 갈 수 있었던 구미전자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전자 제품 만지는 걸 참 좋아했어요. 집안에 있는 시계, 카메라 등 전자제품 참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아들은 납땜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그가 공무원이 되길 원했고, 결국 고승기 본부장이 인문계로 진학하면서 전자공학도의 꿈은 멀어지게 된다.
“저는 공무원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 들어가면 장차 사업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형한테도 얘기했죠. 최악의 경우 내가 망하면 밥만 먹게 해달라고.”
고승기 본부장의 성공과 좌절의 인생 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 전문대학에 진학한 고승기 본부장은 당시 육군 현역 보다 복무 기간이 3개월 더 길었던 의무경찰을 지원했는데 곧 이어서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된다.
“제가 입학할 때는 2년제 학교였는데 갑자기 4년제 학교로 바뀐 거예요. 당시에는 편입도 없었거든요. 복학을 해야 하는데 학교가 제시한 구제 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의경으로 3개월을 더 복무하는 바람에 구제 기간 내에 복학을 못했고…결국 학교로 못 돌아갔지요.”
복학을 하려면 아예 대입 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 시작은 생수 장사였다.
“대전에 터를 잡고 생수 장사를 시작했는데 다들 미쳤다고 그랬어요. 산 좋고 물 좋은 대전에서 누가 물을 사 먹겠냐며… 정말 그렇더라고요.”
칼이 되어 돌아온 믿음
일본에서는 물을 사서 먹는다는 정보를 입수, 멀리 보고 시작한 첫 번째 사업은 그렇게 보기 좋게 망했고 어쩔 수 없이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직장은 <농심> 계열사의 유통 체인본부였다. 별정직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3년 동안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고, 결국 별정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규직이 되면서 월급도 많이 받고 보너스도 두둑했는데 어느 날, <농심>이 회사를 <중앙체인>이라는 신생 회사에 매각을 했어요. 당시 열한 명이 신생 회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급여가 확 줄어버리니까 한 달 만에 열 명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저 혼자 남았어요.”
고승기 본부장이 신생 회사에 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대표의 마인드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저런 분 밑에서라면 충성을 다해도 되겠구나 생각했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신생 회사는 직원들이 성과를 올리는 만큼 인정해 주는 회사였다. 괄목한 성과들을 만들어 내었던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승진하는 특별 대접을 받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대전 지점장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승진은 지점장에서 멈추지 않았다. 회사의 지점들이 분사되면서 지사의 개념으로 전환되었고 대전 지사의 대표가 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은 것이다.
“대표직 수락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중앙체인> 대표님과 면담을 하루 앞두고 있었는데, 대표님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이사님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대전지사를 가겠다고 하면서 저 보고는 홍성 지사를 가라는 거예요. 홍성 지사는 당시에 적자가 심각했거든요. 하지만 저보다 더 높은 이사님인데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대전 지사를 포기하고 홍성지사를 맡았죠.”
이후 고승기 본부장은 홍성 지사를 살리는데 매진했고, 홍성 지사는 기적적으로 4개월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본사의 지원이 중단되고 만다.
“중간에서 이사가 장난을 친 거죠. 본사 대표는 1년이라는 약속 기간도 모르고 있었고 이사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중에는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승기 본부장을 밀어내면서까지 대전지사를 차지했던 이사는 영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더니 결국 회사를 포기하게 되었고, 고승기 본부장은 홍성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전 지사의 대표직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근데 욕심이 너무 컸던 것 같아요. 두 마리 토끼는 다 못 잡는다 그러잖아요.”
대전을 살리기 위해 홍성을 자신의 최측근에게 맡겨두었던 고승기 본부장. 하지만 그 믿음이 화를 불렀다. 홍성을 맡겼던 그의 최측근은 유통과정에서 물건들을 빼돌려 그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소송까지 가서 결국 변상은 받았지만 믿었던 사람들한테 치이고 당하고 하다 보니까 정말 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지분을 모두 빼서 다 현금으로 돌리고 사업을 접어버렸습니다.”
장기적 비전으로 시작한 보험영업
사업을 접고 휴식에 들어간 그에게 동부생명에서 리쿠르팅이 들어왔다. 영업으로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낸 그를 모셔가기 위해 동부생명의 충청 본부장과 본사의 부사장까지 면담을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영업에는 자신 있었지만 보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면담 자리에서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인맥으로 보험을 팔지 않고도 성공할 확률이 몇 퍼센트냐고 물었어요. 두 사람 다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고요. 영 퍼센트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들 다 리쿠르팅에 순진했어요. 10%만 된다고 했어도 당시의 저는 했을 거예요. 장기적으로 일할 곳을 선택하려 했으니까요.”
동부생명의 손을 뿌리친 그는 핸드폰도 꺼둔 채 14일간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동부생명에서는 계속 매달리더라고요. 결국 등 떠밀려서 동부생명에 들어갔고 첫 달에 4억 8천만 원 정도 보험 모집을 했어요.”
마지못해 시작했지만 보험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고승기 본부장은 자신의 역량을 살려 팀을 꾸리기 시작했고, 자신의 관리 능력을 인정해주는 6인의 동료들과 함께 미래에셋생명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의 지점을 꾸리겠다고 마음먹고는 동부생명에서의 계속분 3억을 포기하면서 옮겼죠. 대신 1억을 보조받기로 했었는데, 지점장은 차일피일 미루더니 안 주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니까 저도 마음을 비우게 되고…결국 포기하게 됐죠.”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본부장하고 술자리를 하면서 농담을 던졌어요. 그때 돈 아직 안 준 거 살짝 서운하다고. 그런데 알고 봤더니 회사에서는 이미 2년 전에 지점장한테 1억을 지급한 거예요. 지점장이 현금으로 받아서 쓱싹 한 거였죠. 그래서 지점장한테 항의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당신한테는 꼭 줄 테니 비밀로 해달라’는 거예요. 거절하고 전쟁을 시작했죠.”
보험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착실하게 정도를 걷는 그의 옆에는 이상하게도 배신자들이 늘 붙어 다녔다. 믿었던 지점장은 사건을 덮어버릴 목적으로 고승기 본부장을 내보내려 했고, 결국 그에게 한 달의 영업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서 고승기 본부장은 분노에 찬 동료들을 다독이며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게 된다.
1억을 포기하며 선택한 <프라임에셋>
해외의 GA시스템에 관심이 많았던 고승기 본부장은 법인의 비중이 큰 선진국의 보험 구조에 주목했고, 18군데의 GA를 돌아다녔다. <프라임에셋>도 그중 한 곳이었다.
“<와우에셋>이라는 GA에서 1억을 준다고 약속했어요. 고민되더라고요. 근데 이 업계를 다녀보면 사탕발림이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프라임에셋>을 관찰해 보니까 다른 곳이랑 달랐어요. 제가 승진을 거듭했던 유통회사랑 비슷한 면이 많더라고요. 후발주자로 시작하지만 노력하면 지사장도 되고 본부장도 될 수 있는 구조가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팀원들 모아놓고 얘기를 했죠. 1억을 준다는 <와우에셋>도 있고 아무것도 안 주는 <프라임에셋>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은 <프라임에셋>인 것 같다.”
그렇게 <프라임에셋>과 인연을 맺게 된 고승기 본부장과 조직원들… 하지만 시련은 계속된다.
“<프라임에셋>을 처음 찾았을 때 예전 보험회사에서 알던 분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분을 제 유치자로 삼게 됐어요. 조만간 지사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별 의미를 두지는 않았죠.”
이전 회사에서도 큰 사고를 치고 회사를 옮겼던 유치자.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던 <프라임에셋>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위안을 삼으려고 했었지만… 사람에게 상처받는 시련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그 유치자는 당시 영업4본부 고원준 이사 산하의 지사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프라임에셋>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투명성을 스스로 감추기에만 급급했고, 고승기 본부장에 대한 영업관리자라는 논거를 내세우면서 말도 안 되는 조직운영을 하려고 했다. 게다가 회사 핑계를 대며 월급날을 계속 미뤄 돈을 유용했고, 팀 운영 경비와 총무 여직원의 월급도 주지 않아 고승기 본부장의 사비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충당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회사의 급여 지급 방식은 지금처럼 모든 영업가족에게 회사가 직접 지급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영업관리자들에게 해당 조직의 전체 급여를 지급하면 관리자가 조직들에게 분배하는 시스템이었다.
유치자를 잘못 만나 감수해야 했던 부당한 대우들. 그를 매혹시켰던 <프라임에셋>의 이상적인 시스템이 영업관리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발현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윤 대표의 말 한마디에 고승기 본부장은 재도약의 힘을 얻었고, 영업4본부 소속이 되어서 고원준 이사와 함께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기다렸던 영업본부로 독립하게 되면서 <프라임에셋>에서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19본부 아카데미 Skill Up!
‘남과 같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 고승기 본부장. 그가 <프라임에셋>에서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교육이었다.
“일 년 동안 리쿠르팅을 안 했어요. 우리가 몸소 체험을 하고 <프라임에셋>을 확실히 알고 나면 리쿠르팅을 하자고 했거든요. 시작은 더뎠죠. 우리가 먼저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당장의 성과를 포기하고 7명의 기존 멤버들만으로 1년을 꾸려갔던 고승기 본부장. <프라임에셋>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데 1년의 시간을 보낸 뒤 신입사원을 뽑았고, 바로 교육에 들어갔다.
“유통회사에서 일하면서 확실하게 배운 게 있어요. 내가 아는 건 후배들에게 모두 가르쳐 줘야 한다. 다른 사람들 보면 내 걸 가르쳐주면 내가 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생각은 달라요.”
그는 신입사원들의 교육에 모든 걸 쏟았다. 교육 진행비, 식대에 타 지방에서 일하는 신입사원들을 위해 숙박비까지 지원하면서 매달 250만 원의 비용 지출을 감수했다.
“그렇게 교육을 통해 훌륭하게 성장한 친구가 최용희, 김성호 두 사람이에요. 최용희 사원은 매달 500만 원, 김성호 사원도 400만 원 가까이 버니까 모범적이죠. 이제는 그 친구들이 신입사원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고승기 본부장은 신입 사원 교육에 이어 기존 사원들의 ‘스킬업(Skill Up)’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19본부 직원 모두에게 끊임없는 교육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신입 사원 교육에서 스킬업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른 영업본부에 비해 그가 19본부의 운영에 투자하는 액수는 상당했다.
“월평균 천오백 정도 버는데 사업비만 천만 원 정도가 나가지요. 어차피 저는 단기간에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아깝지는 않아요.”
교육받은 사원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는 고승기 본부장의 영업19본부. 대부분의 본부장들이 신입 사원 교육에 들어간 원금을 회복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벌써 큰 수익이 발생하고 있다며 싱글벙글이다. 하지만 교육을 다 받은 팀원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을 경우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을 텐데도 그의 생각은 긍정적이었다.
“그런 위험 부담은 충분히 감수하고 시작했지요. 하지만 우리 본부는 이직률이 5%가 되지 않아요. 우리 본부에 있으면 자신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프라임에셋>이니까 그런 위험은 더 적어지죠. 밑에 직원들이 성장하는 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니까요.”
따뜻한 감성 그리고 단호한 시스템
동료 직원들은 고승기 본부장에 대해 따뜻한 감성으로 사람을 감싸고 단호한 시스템으로 조직을 이끈다고 평한다. 현대 조직 사회가 요구하는 감성적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이라는 말이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밑에 직원들의 성장에 필요한 지원은 다 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부분들이 있으면 엄하게 바로잡아 줘야죠.”
시작이 더뎠던 만큼 아직 본부 분리는 하지 못한 고승기 본부장. 하지만 대전에 일곱 개의 지사를 거느리고, 울산, 부산, 서산에는 지사를, 청주와 일산에도 팀을 보유한 알차고 잠재력 풍부한 본부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가 본부 관리하면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최종에 가서는 최고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완벽한 분리를 하고 싶어요. 우리 <프라임에셋>이 만 명 FC가 목표인데 제가 만 명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하고 싶은 게 꿈입니다.”
“(기자) 속도가 더디잖아요?”
“이제 속도 내야죠. 울산지역, 부산지역의 영업가족이 들어오면서 본부 인원이 두 배가 됐는데… 속도도 내면서 먼 미래에 최고가 되면 <프라임에셋>의 대표이사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몸만 건강하면 80세까지 일할 수 있으니까 정년 퇴임은 안 하려고요.”
40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 하지만 그는 아직도 40년 뒤를 바라보며 삶의 그림을 그린다. 우보만리(牛步萬里), 그렇게 소처럼 한발 한발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가 바라는 그곳에 가장 먼저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현재
고승기 본부장은 115본부, 151본부 두 개의 본부를 분할하며, 늘 그래왔듯 굳건하고 우직한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