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2년 2월 I 인터뷰 I 글 _ 이용지 기자 I 사진 _ 노현우 포토그래퍼
영업6본부의 진상두 본부장. 2003년 말, <프라임에셋>이 서울 성수동의 오피스텔을 떠나 광장동에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던 시절에 합류하였다. 회사가 아직 굳건한 토대를 잡지 못했던 초창기에는 잠시 타 GA로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프라임에셋>으로 돌아왔고, 이전과는 다른 강력한 열정으로 회사의 성장에 동참을 하였다.
2003년 초, 진상두 본부장이 구리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오피스에서 이윤 대표를 알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시간은 우연의 연장선이 아닌, 치열한 승부근성과 냉정한 선택, 그리고 열정으로 이어진 시간이었다. 회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특정한 이익을 공유하던 파트너의 관계에서 어느덧 모든 것을 올인하고, 열정으로 달렸던 시간들. 결국 그는 지난 3분기 동안의 업적만으로도 FY2012 <프라임에셋>의 운영위원으로 확정되었고, 이제 그의 명함에는‘본부장’이 아닌‘영업이사’의 직책이 새겨지게 되었다. 영업6본부의 본부장으로서, 그리고 회사의 운영위원으로서 그가 생각하고 다짐하는 일과 열정을 공유해보자.
우연에서 인연, 그리고 믿음으로
시간을 잠시 과거로 되돌려보자. 2002년 12월을 끝으로 메리츠화재에 사표를 낸 이윤 대표. 그에게 남은 것은 수억 원의 빚과 암울한 미래였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2002년에 설립한 <프라임에셋>을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리점을 시작했지요. 2002년까지 성수동에서 업무를 보던 정지연 실장은 2003년 1월부터 출산휴가를 들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송강임 실장이 메리츠화재를 떠나서 성수동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저는 당시에 메리츠화재에 사표를 내고 과거에 영업소장을 담당했던 구리영업소 한 켠에서 <프라임에셋>의 외곽영업을 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현대해상의 잘 아는 소장님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는 본인이 현대해상을 그만두고 대리점 영업을 하려고 법인을 차려놓았는데 갑자기 지점장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대리점 운영을 못하게 되었다면서 저보고 대신 법인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돈 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던 시기였으니까 당연히 OK를 했지요.”
이윤 대표가 임시로 맡은 법인은 구리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옥탑에 있는 사무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금은 타 GA의 상무로 있는 차모씨를 만났고, 얼마 후 그는 기아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보험영업을 하던 진상두 이사를 리쿠르팅 하였다.
현대해상 지점장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윤 대표는 구리의 법인 운영에서 손을 때고 성수동 오피스텔에 있던 <프라임에셋>을 광장동으로 이전시켰다. 좀 더 넓어진 사무실에서 TM영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현재 영업3본부장으로 재직 중인 허연희 이사를 TM실장으로 스카우트하였고, 한 편으로는 대리점들을 모아서 영업의 한 축으로 삼고자 열심히 뛰어다녔다. 진상두 이사가 구리를 떠나서 <프라임에셋>에 합류한 시점이 바로 이즈음이다.
“사실 그 당시의 법인은 대부분 영세하고 힘들었어요. 프라임에셋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법인을 하는 사람들끼리 상생하자는 의미로 M&A를 많이 했어요. M&A라는 게 지금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대리점의 영업 코드를 서로 공유하는 의미였지요. 개념이 아주 단순했어요.”
개념이 단순한 만큼, 모이기도 쉬웠지만 헤어지기도 쉬웠다. 게다가 손보 대리점들은 거의 자보만 다루던 시절이었기에 법인이 분리되어도 수수료에서 얽힐 일이 없었다. 오직 서로 간의 이익 공유를 위해서 뭉치고 헤어지는 시절이었기에 법인의 이합집산이 매우 심했다. <프라임에셋>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조직을 갖고 있는 회사가 아니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서로 간의 도움을 얻고자 모인 연합체에 불과했다. 회사의 초기 시스템 안에서 이합집산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경영 윤리 상으로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상식적인 일이었다.
“유니온 식이니까 어차피 서로 매출을 합병하는 그런 단계였어요. 서로 다른 대리점들이 모여서 사무실을 공유하고, 운영비를 아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프라임에셋>은 당시에 가장 많은 수수료를 지급하는 법인이 아니었다. 또한 원수사로부터 풍족한 지원을 받는 법인도 아니었다. <프라임에셋>에 합류한 다음 해 봄, 진상두 이사는 <OO인슈>라는 법인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프라임에셋>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회사의 기본적인 신념에 기반한다. 회사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프라임에셋>이 지키는 것이 있다. 결코 감언이설 따위로 사람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프라임에셋>이 영업가족에게 보여준 신뢰의 기반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여하간 회사의 초창기 본부장 중에 <프라임에셋>을 떠난 사람은 진상두 이사 말고도 많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진상두 이사가 유일하다. 아직까지는.
장기 시장에서 성공을 외치다
<프라임에셋>에서 다시 이윤 대표와 손을 잡은 진상두 이사는 회사의 극적인 성장 흐름에 함께 몸을 싣고 엄청난 동반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사장님이 방향을 잡아준 거죠. 장기 시장에 뛰어들지 않으면 GA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고 자동차 보험은 발전이 없을 거라고 단정했어요. 그리고 설계사를 모집해서 장기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죠.”
당시에 장기보험은 원수사의 영업소에서나 다루던 상품이었다. 장기보험은 자동차보험처럼 수당이 익월 지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년 가까이 나누어서 지급해야만 했다. 문제는 서로 간의 불신이었다. 설계사 입장에서는 법인이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데 계약을 넣을 수가 없었고, 법인 입장에서는 매집 계약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데 수당을 지급할 수가 없었다. 설계사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수당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거였고, 법인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경유 매집이 아닌 진성 계약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손보법인에 설계사로 등록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시절이었다. 둘 다 동시에 이루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회사는 일단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여서 선지급을 시행하기로 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매집을 해서 큰돈을 벌었죠. 설계사들이 청약서 하나씩 들고 오면 수표 하나씩 들고 왔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당시에 하루 일당이 100만 원이라고 농담 삼아 얘기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대박의 바람이 불면서 인원도 엄청 늘어나게 된 거죠.”
장기 시장 진출 1년여 만에 GA 장기 시장 선두로 올라선 <프라임에셋>. 당시 구리에서 영업을 하던 진상두 이사의 조직도 엄청난 매출을 올리며 대박 신화를 달성한다. 하지만 회사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프라임에셋>은 하나의 회사로서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진상두 이사 역시 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본인 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했었고, 아직은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열중할 단계는 아니었다.
특별한 공동체에 대한 믿음
<프라임에셋>이 조직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적인 회사로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 시행한 ‘밸류체인’의 획기적인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즈음부터 독립 운영 조직처럼 활동하던 각각의 본부들은 회사 자체의 성장과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을 지워가기 시작했고, <프라임에셋>이라는 특별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은 커져만 갔다. 외곽의 독립 운영 조직이었던 진상두 이사도 2006년부터는 그동안의 영업 파트너 관계에서 영업6본부라는 조직편재로 변신을 하였고, 지금까지 <프라임에셋>의 핵심 본부로서 큰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합집산이 심한 GA 시장에서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금전적인 관계들이 첨예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진상두 본부장이 <프라임에셋>에서 변함없는 신뢰를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사와 대표의 특별한 매력과 능력을 인정하는 거라고 보면 될 겁니다. 사실, 구리에 있을 때 원수사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아내 명의로 코드 빼고 이원화하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죠. 임차 지원과 같은 유혹도 많았고요. 저도 인간이니까 고민은 했죠. 그런데 아내가 그래요. 지금 당장은 좋겠지만 회사의 방향과 배치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요. 한 조직에 올인을 한 사람과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하고 회사에서 같은 대우를 해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욕심은 한도 끝도 없어요. ”
진상두 이사와 아내 하경순 실장의 판단은 현명했다. <프라임에셋>에서는 큰 리스크 없이 안정적이면서 꾸준한 규모의 성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13본부, 2011년 48본부를 분할하고도 매년 전체 본부장 중 연봉 상위 그룹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진상두 이사. 운영위원으로 확정된 2012년부터는 본부의 성장과 본부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재도약 할 것임을 다짐한다.
“작년에는 너무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서 본부를 2개 정도는 분할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매년 2개 정도는 꾸준히 분할해 나가려고 합니다.”
사무실에서 영업가족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진상두 본부장
페어플레이의 중요성
진상두 이사는 <프라임에셋>의 폭발적인 성공과 행복 이면에 소외받는 가족들이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서도 말을 이었다.
“소외받는 본부, 또는 소외받는 영업 가족이 생기지 않도록 소통의 문화가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와 본부장, 또는 본부장과 본부장 사이, 임원진과 FC들 사이에도 네거티브가 아닌 상생을 논하는 대화가 폭넓게 이뤄져야 합니다. <프라임에셋>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조직임과 동시에 가장 이직이 쉬운 조직일 수도 있잖아요. 서로 간에 믿음이 생길 수 있도록 가족들을 더 보듬고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랍니다.”
조직의 성장에는 홍역과 같은 성장통이 있기 마련이다. 진상두 이사는 지금의 성장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도한 실적주의를 경계했다.
“회사의 성장은 계속해서 가속을 해야겠지만,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페어플레이’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프라임에셋>의 규정이 잘 정리되어 있잖아요. 법을 만들어 놓고 반칙하는 사람이 득을 보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죠.”
진상두 이사는 후배 본부장들에게도 따끔한 일침의 말을 전했다.
“관리자들이 실적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실적과 승격 시스템만 신경 쓰면서 본부장이 된 사람들이 많아요. 그게 회사가 갖고 있는 딜레마일 수도 있겠죠. 실적만 올리려고 가공 계약을 하거나 특정 상품을 집중 공략하다 보면 결국 타 법인이 아닌 우리끼리 싸우게 되는 거예요. 인사 위원회가 열린 이유도 이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FY 2011 회사의 인사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진상두 이사. 동료의 잘못을 단죄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자리이지만, 고속 성장중인 <프라임에셋>에서 앞으로 인사위원회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부장 간의 페어플레이를 통해 건강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상이몽이라고 해야 하나? 선배가 후배들한테 존경받고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이런 시스템이 아니에요. 조금 아쉽죠. 과거에는 휴머니즘이 살아 있었는데 너무 치열해지다 보니 본부장들 간의 유대감이 많이 느슨해진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는 공정한 경쟁 속에서 소외되는 본부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상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결혼 20주년, 그리고 <프라임에셋>
진상두 이사와 그의 아내이자 오랜 사업 파트너인 하경순 실장은 작년에 결혼 20주년을 맞았다. 다정다감한 남편으로서, 내조와 외조를 겸비한 아내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두 사람. 20주년을 기념하며 아들, 딸과 함께 리마인드 웨딩을 올렸고, 회사는 오랜 세월 동안 수고한 그들 부부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했다.
“저희 부부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었지요. 회사가 구성원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무엇인가를 배려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감성적인 배려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측면도 그래요. 분부 분할에 대한 보상 부분을 전년도 보다 파격적으로 늘리고, 본부 분할을 못한 본부장들에게도 회사의 이익을 공유하도록 하는 성과 규정을 신설한 것을 보면 우리 회사는 정말 좋은 회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2년 <프라임에셋>은 FC 1만 명이라는 GA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향해 순항 중이다. 그리고 진상두 이사 역시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프라임에셋>이 지금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밸류체인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잖아요.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봐야죠. 그 과정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늘 소통에 귀 기울이는 회사가 된다면 보험업계에 경쟁자가 없는 절대 강자로 자리할 수 있을 겁니다.”
부모의 외모를 닮은 꽃미남, 꽃미녀를 키우고 있는 진상두 이사 부부. 진상두 이사는 아들을 보험학과에 진학하도록 권유했다. <프라임에셋>의 지속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하면 아들을 <프라임에셋>의 FC로 입사시킬 계획입니다. 나는 보험이 이제 우리 집의 가업이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좋은 직업이고 평생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잖아요. 군대 가서 보험 공부 열심히 해서 변액 자격증까지 따게 해야죠. 우리 아들도 저처럼 본부장까지 승진해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의 카멜레온
진상두 이사는 자신의 성격에서 긍정과 적응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강조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만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두 가지의 요소가 자신의 성격에 포함되어 있기에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고 여긴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자칫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돌아 봅니다. 그런데요, 그런 마음가짐이 나 스스로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삶이 되면 안 되겠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빨리 현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는 카멜레온 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요. 내가 옛날에 이윤 사장님보다 나이가 많고 보험을 먼저 시작했다고 해서 사장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면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겠죠. 제가 긍정적이고 카멜레온 같은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프라임에셋>에 정착을 하고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긍정의 마음으로 <프라임에셋>에 자리한지 벌써 7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세월 동안 법인대리점의 구조와 규모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결코 꿈도 꿀 수 없었던 법인대리점의 영속성을 확보한 GA들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기업체로서의 조직문화까지 겸비한 <프라임에셋>도 있기 때문이다. 진상두 이사는 회사가 더욱 안정되고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이제 회사 곳곳으로 관심을 펼치고 있다. 구성원 간에 악의의 경쟁이 아닌 공동체의 상생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그. 모두가 공동체의 문화를 자율적으로 지켜가면서 언젠가 인사위원회의 필요 자체가 무의미해질 <프라임에셋>을 기대해본다.
2022년 현재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13본부, 48본부에 이어 79본부, 121본부, 139본부 3개의 본부를 더 분할하면서 꾸준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