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12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_ <프라임에셋>홍보팀
영업24본부 문주원 본부장.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FC들이 꿈꾸는 영업본부장의 위치에 올랐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 그이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세상은 혹독한 훈련과 인내를 강요했다. 끝없는 야근과 주말도 없이 일하던 시절, 6개월을 무보수로 일했고 1년 반 동안 50여 만원의 월급으로 생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경제적 어려움을 고스란히 떠 안으며 <프라임에셋>에 자신의 젊음을 올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선배에 대한 믿음 하나로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문주원 본부장. 부족한 자신의 능력을 절감하며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무실적 FC는 인고의 시간을 보기 좋게 걷어차며 안정된 성공 가도에 안착했다. 자동차보험 중심이던 <프라임에셋>에서 생명보험을 최초로 시작했던 문주원 본부장. 스산한 초겨울, 홍대 앞 작은 카페에서 만난 문주원 본부장은 기다림 위에 내 던진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회상하며, 그만의 단단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배동의 빈곤층을 아시나요?
행복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모두가 가난하면 가난 때문에 불행하지 않다는데… 오늘 만난 이 사람 어쩌면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다. 30여 년의 시간과 열정이 온전히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상대적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 영업24본부의 문주원 본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 서초구 방배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문주원 본부장. 하지만 행정구역은 서류에 불과할 뿐이다. 우면산 자락 미개발 빈촌에서 자라난 그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시간에 교통비와 식대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으며, 대학에 가서도 4년 내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자동차 왁스를 팔아야 했다.
“해수욕장에 가면 안전 요원 있잖아요. 사정 모르면 저를 안전요원으로 알았을 거예요. 매일 땡볕 아래에서 자동차에 광을 내느라 온몸이 시커멓게 탔거든요. 살이 벗겨져서 더 벗겨질 것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정말 열심히 한 거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고작 학비 마련할 정도. 여전히 교통비와 식대 걱정에 시달려야 했으니, 학교 앞 주점에서 술잔에 젊음을 털어내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의 상대적 박탈감은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그 고된 일상 속에서도 그는 불행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처한 다른 환경을 인식하고 그 환경을 바꾸는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환경이 나은 다른 이들보다 더 바쁘게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그려 나갔다.
문주원 본부장은 기계공학과 출신이다. 당시 취직이 잘 되고 연봉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공대에 입학한 문주원 본부장. 하지만 학창시절 아르바이트로 전공 관련 업무를 경험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 토목공사 도면을 제작하는 회사와 건설기계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않아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면서도 급여나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됐죠.”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전공 관련 기업에 취업을 했지만 문주원 본부장은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계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내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크게 성공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으로 전혀 새로운 분야에 당찬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온라인 사이트에 AIG라는 생명보험사에서 FC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입사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교 시절 자동차 전용 코팅제나 왁스를 팔아본 영업 경험을 높이 평가 했는지 저를 리쿠르팅한 매니저(SM)는 저에 대해 기대가 컸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않던가. ‘왁스 셀링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한 문주원 본부장이지만 그의 영업 능력은 보험 영업에서만큼은 정말 무기력했다. 그는 자신을 동적인 사람이라 믿었다. 그래서 좀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성장에 따라 이익이 발생하는 보험 영업이 제격일 거라 판단했던 것. 그렇게 자신의 열정과 능력이 성공의 크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입사 첫 달, 군대 고참이었던 친구에게 종신보험 한 건을 판매하고 익월에 받은 수수료가 분급으로 62,800원. 다음달 어린이보험 1건 그리고 두 달 동안 무실적. 이후 실적이 생겨도 금액이 적어 회사에서는 존재 가치 제로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팀에서는 ‘팀 생산성을 다 까먹고 있는데 왜 자르지 않는가!’라며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당시 그의 매니저는 ‘저 친구가 뭔가 하나만 풀리면 잘 할 친구인데…’라며 팀원들의 컴플레인을 뒤로한 채 그를 지켜주었다. 보험 회사의 직원이면서도 돈이 없어 주말이면 다시 왁스를 팔기 위해 거리에 나서야 했던 27살의 청년. 젊은 나이에 보험 영업의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그 때 연애도 하고 있었거든요. 주말에는 왁스 팔러 나가야 하는데 여자친구는 놀아달라고 하고, 돈은 없고, 카드 빚은 늘어가고… 지금이니까 웃으며 말하죠. 그때는 장난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매니저가 팀원들을 모두 불러놓고 본인은 <프라임에셋(당시 프라임인스넷)>이라는 GA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GA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프라임에셋>이 어떤 회사인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문주원 본부장.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매니저를 믿었고, 그래서 무조건 같이 가겠다고 했다. 당시 AIG생명을 떠나서 <프라임에셋>으로 함께 온 유일한 동료가 있었는데, 지금의 영업4본부장인 고원준 이사다.
자동차보험 일색이던 <프라임에셋>에 생보를 정착시키겠다는 굳은 의지로 실적이 형편없던 두 FC를 데리고 AIG를 떠난 그의 매니저는 <프라임에셋>의 전(前) 영업지원실장이었던 박병준 실장이다. 당시 <프라임에셋>은 생명보험 월 매출이 100~200만원으로 FC 1인 매출도 안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6년 후, 그들이 선택했던 <프라임에셋>은 대한민국 1등 GA라는 명성을 안게 되었고 한 사람은 영업이사로, 한 사람은 영업본부장으로 <프라임에셋>의 주역이 되었다.
“박병준 실장님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얘를 데리고 가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시에 저의 삶은 그렇게 암울 했어요. 하하하”
내 연봉은 300만 원
문주원 본부장. 그가 회사에 출근해서 처음 한 일은 영업이 아니었다.
“정확히 2004년 12월 달에 처음 본사를 방문한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회사는 자동차보험 위주의 영업 환경이었어요. 더군다나 생명보험 출신은 전무한 상태였지요.”
자동차보험 일색의 <프라임에셋>에서 생명보험을 하겠다며 회사 한 켠에 자리를 잡은 박병준 실장과 그를 따라 온 두 FC. 하지만 수 개월이 지나도 매출은 나오지 않았고 주변을 오가는 영업가족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삼인방을 보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힘든 시기를 견뎌내야 했던 문주원 본부장은 당시 박병준 실장을 도와서 생명보험과 관련한 교육자료를 작성하고 회사 소개서를 제작했다. 수수료 테이블 작업과 신입사원의 입사를 위한 PT자료를 만드는 등 생보 영업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퇴근도, 주말도 반납하고 열정을 불사르며 일했다. 하지만 영업 실적 없는 FC에게 급여는 사치에 불과했다. 어려운 시절의 <프라임에셋>, 실적 없는 생명보험 팀. 그는 그렇게 6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 하루 빨리 자신의 그릇을 완성하고 영업 일선에 뛰어들어야 하건만…, 그래도 6개월 후 나아진 것이 있다면 월 50만원의 고정 급여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회사에 영업을 하러 왔지만, 당시 생보사업부의 박병준 실장을 도와서 일을 했기에 반은 스탭이었다. 결국 그가 <프라임에셋>에 와서 1년간 벌어간 총 수익은 고작 300만원이었던 것.
어느덧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람 하나 믿고 기다린 시간 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문주원 본부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머리는 복잡하고 몸은 바쁜 하루 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불확실한 성공을 담보로 FC로서의 자기 개발에만 헌신해야 했다.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기다림은 망상일 뿐…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다. <프라임에셋>은 전체 생보 GA중 5위 안에 포진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실적도 없이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던 FC는 영업본부장이 되었다. 그는 영업본부장이 되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남들도 다 하는 선에 자신을 맞출 수는 없었다. 남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발로 뛰는 영업을 시작했다. 무조건 찾아가기,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하기이다. 페이스 투 페이스, 맨투맨 마케팅을 실시한 것이다.
“타 생명보험사 지점 사무실에 들어가서 그냥 한 바퀴 돌아봅니다. 그러다 방에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그 앞에 앉아서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명함을 주는 거죠. 어떤 사람은 머 이런 사람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매우 흥미로워합니다. 그들이나 저나 처지가 비슷하니까 이해의 폭도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그들도 항상 증원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문주원 본부장의 무모한 듯한 열정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는 것이다. 화성인처럼 행동하는 특이한 문주원 본부장에게 호기심을 느꼈을 법도 하다. 그렇게 관계를 트고 연락처를 주고 받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명함을 데이터화 시키다 보니 현장에서 형성된 관계가 이메일이나 쪽지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09년, 그는 리쿠르팅의 또 다른 통로를 개척한다.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 운영이 그것.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통로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 문주원 본부장은 온라인 상에서 모두가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본인이 그토록 싫어하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글 쓰는 것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1주일에 한 번은 꼭 글을 올리게 되는 거예요. 사실 무척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문래동 사무실에서 인천 송도 집까지 출퇴근 시간 내내 제가 하는 일은 노트를 꺼내놓고 열심히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쓰는 것이랍니다”
결국 작가로 변신한 그의 증원 방식은 큰 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도 자신의 글을 보고 판단해주는 사람들. 그렇게 블로그와 카페는 하나의 사업장이 되어갔다. 2010년 3분기에 분할된 김상운 39본부장도 블로그에서 인연이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본부분할이라는 성과까지 만들어 내었다.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에게 솔직 담백한 문주원 본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어느 정도 생각이 걸러진 상태에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공간… 남들과 다르게 발 빠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문주원 본부장. 트위터에서도 실력 발휘 할 수 있도록 압박해 본다.
회사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
사실 <프라임에셋>에서 보면 5년 만의 본부장 승격은 그리 빠른 편이 아니다. 다른 본부장에 비해 좀 늦은 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젊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팀장이었던 시절에 한번은 사장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 팀장, 만약 누군가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과 문 팀장의 나이를 바꾸자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바꿀 거야. 왜냐하면 내가 문 팀장의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자신이 있거든!’ 저는 이제 겨우 34살이니까 앞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공은 그가 몸담고 있는 <프라임에셋>의 성공과도 맥을 같이한다. “수많은 GA가 폐업을 하고 시장에서 도태되고 있는 험악한 현실 속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프라임에셋>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제 개인도 함께 성장했죠. 그게 <프라임에셋>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회사는 날로 발전을 하는데 개인의 발전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의 집 잔치 구경하는 셈이지요.”
<프라임에셋>이 제시한 ‘자율적 선택’. 하지만 책임감 있는 자율적 선택이란 그 범위도 넓고 직접 실천하기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힘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프라임에셋>의 영업본부장, 어쩌면 <프라임에셋>의 신입 FC들이 꿈꾸고 있는 그 자리에서 과거를 뒤돌아보는 그의 표정은 나이답지 않게 단단하다. 매 순간이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의 생존문제가 달렸다고 생각하면 그는 본부장으로서의 책임과 소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본인의 자리에 따라서 만나는 사람과 대화상대 그리고 고민거리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FC는 본인, 지사장은 팀원, 본부장은 지사장과 주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본부장이 되고 나서 가장 크게 와 닿는 단어는 책임감입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본부 내에서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영업조직의 최종 관리책임자가 본부장이기 때문에 영업조직의 성장과 리스크를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선택과 결정에 늘 긴장하게 됩니다. 매 시간이 선택과 결정이니 말입니다.”
그는 또한 FC들의 ‘성장통’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 말한다. 그래서 ‘진심’이 가미된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 가능한 한 FC들의 생각과 의사표현을 존중하고 만약 생각이 다르면 기다려준다. 힘든 시기를 다른 생각과 노력으로 상생의 시기로 탈바꿈 시켰던 그이기에, 또한 능력 없고 부족한 FC를 꾸준히 기다려준 회사의 고마움을 체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관계 형성의 인간관은 영업적 인간으로의 탈피이다. 매출에 연연하기 보다 사람을 기다려 주는,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오랫동안 <프라임에셋>에서 생존하는 것. 그것이 그가 꿈꾸고 실현하고 싶은 미래이다.
성공의 핵심은 무모한 인내와 창의적 실천
갑자기 그가 생각하는 <프라임에셋>에서의 목표가 궁금해졌다.
“회사 내에서 특정 위치를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재 운영위원이라는 제도도 있어서 한번쯤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저에겐 목표를 가지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지금 이순간에 매진하겠다는 문주원 본부장. 그에게 성공이란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고, 남들보다 가족들을 좀 더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란다. 얼핏 소박해 보이지만 가장 가치 있고 원대한 꿈. 그런 꿈을 꾸는 그가 <프라임에셋>의 식구들에게 한 마디 남긴다.
“지금까지 양적 성장에 포커스가 집중되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장 악화로 인해 영업이 힘들다는 FC나 외곽에서 운영경비의 압박으로 어렵게 지사를 운영하는 지사장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생산성이며 총 매출량입니다. FC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GA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좋은 영업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회사 차원에서 보험 마케팅, 전문 세일즈 교육의 활성화 등 현장의 설계사가 원하는 영업적 니즈를 채워갔으면 합니다.”
그는 다시 맨투맨 마케팅을 시작하려고 한다. 언제 어디를 가시느냐고 기자가 물으니 그런 계획은 전혀 없다고 대답한다. 계획만 세우기보단 실천을 앞세우는 리더 문주원 본부장. 본부장 명함을 들고 지금 이 순간 타 보험 회사 사무실을 어슬렁거릴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가 풀어내는 젊음과 열정이 새삼 부러워진다.
2022년 현재
문주원 본부장은 158본부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