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1년 7월 I 인터뷰 I 글 _ 이용지 기자 I 사진 _ 노현우 (마니스튜디오)
영업41본부의 이경화 본부장 책상은 여느 FC들의 책상과 다르지 않았다. 본부장실도 없이 검소하게 일반 책상에 앉아서 41본부를 지휘하고 있는 이경화 본부장. 그녀는 본부장으로서 자신의 성공은 FC들이 자신에게 갖는 신뢰에 기인한다고 확신했다. 권위주의를 지우고 영업 가족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성공을 그려가고 있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는 20여 년을 사업 파트너로 함께 해 온 든든한 남편이 지키고 있었다.
21세기는 탈 권위주의 시대로 규정된다. 소비계층의 성향이 다채로워지면서, 조직의 논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 조직이 경직되고 고객을 상대함에 있어서 유연성 또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아래 조직원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21세기를 꿰뚫는 시대정신이라는 얘기다.
영업41본부를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이경화 본부장은 남편 고행남 지사장과 함께 탈 권위주의 리더십을 실천하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광주에서 20여 년의 시간 동안 성공신화를 써 내려온 소문난 부부. 하지만 <프라임에셋>에서 그들의 성공의 발판이 되어준 것 역시 갈등과 시련이었다. 시련을 딛고 빠른 시간 안에 본부 승격에 성공한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신뢰와 소통이 담긴 앞선 리더십을 확인해보려 한다.
산골 소녀의 사랑 이야기
1966년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이경화 본부장. 학교에 가려면 두 시간을 꼬박 걸어가야 하는, 도시와는 동떨어진 산골이었다.
“저희 같은 경우는 들에서 흙하고 자랐죠. 우리 식구들 먹을 만큼 과일이랑 대추 키우고, 겨울 되면 비료 포대로 썰매 타면서… 지금 돌아보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 건 축복인 것 같아요.”
하지만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산골 소녀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행을 결심했고, 의류를 만드는 생산직 일에 종사하게 된다.
“그때도 돈에 대한 개념은 강했어요. 다른 일자리도 많았는데 서울 거주에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해보니까 모이는 돈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생산직 일을 하게 된 거죠.”
성실함에 알뜰함까지 겸비한 이경화 본부장. 그런 그녀를 결혼 상대자로 주목하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남편인 고행남 지사장이다. 서울에서 일을 하던 이경화 본부장. 그리고 광주에 살았던 고행남 지사장. 그 먼 곳에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이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결혼으로 가는 두 사람의 인연이 평범치는 않았다.
“서울에 함께 있던 친구가 광주에 내려갔는데 그 친구 남동생하고도 친하게 지냈어요. 제가 편지를 좀 잘 썼거든요. 친구한테 편지를 쓰면서 남동생한테도 편지를 같이 썼죠. 그런데 친구 남동생 회사에 근무했던 남편이 그 편지들을 계속 함께 본 거예요. 저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죠.”
광주에서 막 사업을 시작한 고행남 지사장은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이경화 본부장에게 끌렸다. 자신과 함께 사업체를 꾸려 나가면서 성공을 그릴 수 있는 바르고 성실한 여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고행남 지사장은 이경화 본부장에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거절했어요. 프로포즈를 받았는데 좀 멋진 말들로 꾀여도 되잖아요. 너무 정직한 사람이어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한 거예요. 자기가 사업을 하나 시작했는데 혼자서 감당이 안 되니까 결혼을 해서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고. 전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나 일 시키려고 결혼하자고 하는 건가 싶어가지고요. 그래서 그만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고, 이경화 본부장은 광주로 내려가 남편의 사업을 함께 하게 되었다.
“제가 일 구덩이에 들어간 거죠. 스포츠 용품을 납품하는 일이었는데, 만드는 공장도 있었어요. 종업원 몇 명 두고 일을 했는데 거기서 정말 많이 싸웠죠. 재봉 일을 해야 하는데 만들어 본 옷도 아니었고 정붙일 곳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하루 근무 시간은 16시간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너무나 힘들었다는 이경화 본부장. 하지만 이경화 본부장을 아내로 맞이한 고행남 지사장의 안목은 탁월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의 내부 일은 이경화 본부장이 모두 통제하게 되었고,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하며 직원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물량들을 쏟아냈다.
“스물셋에 결혼을 해서 스물넷에 첫째를 낳았는데 임신 중에도 계속해서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어요. 애 출산하는 당일까지 일하고, 애 낳고 20일 쉬고 나와서 또 일하고 그랬죠.”
쉬엄쉬엄하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표량을 채워야 한다며 쉼 없이 일했던 이경화 본부장. 첫째 뿐 아니라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도 애 낳는 날까지 일을 했고, 마찬가지로 며칠 쉬고 나와서 또다시 옷을 만들었다.
“임신하고서 일하니까 저를 주변 사람들이 다 칭찬을 했어요. 대신 남편이 욕은 많이 먹었죠. 저렇게 배부른 사람 일을 시킨다고. 억울했을 거예요. 안 시켜도 일을 했을 테니까.”
임신 중에도, 몸이 아플 때에도 일에 매달렸던 이경화 본부장. 물론 신바람이 날 정도로 사업이 잘 됐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일들이 가능했을 것이다.
“저희 공장이 학생들 체육복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광주에서 제일 잘 팔렸어요. 체육사 하면서 남는 돈으로 부동산 임대업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일은 정말 많이 했지만,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경화 본부장은 사업이 잘 풀리면서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은퇴를 하고 월에 천만 원이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잡았고, 책을 보고 공부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계산을 해보니까 노후에 은퇴해서 월 천만 원을 벌려면 재테크를 열심히 해야 되겠더라고요. 비전보드를 만들어서 체크를 해가면서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죠.
비수기 공략법
사업은 계속 잘 되었지만 이경화 본부장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학생들의 체육복이 주력 매출이었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 방학 4개월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비수기가 길다는 것이었다.
“매년 4개월을 쉬는 게 아까웠어요. 근데 뭘 새로 하려고 해도 최소 6개월 정도는 필요하더라고요.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보험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비수기에도 일을 하기 위해 보험 서적을 집어 들고 주경야독에 돌입한 이경화 본부장. 그런데 그녀는 책을 읽고 나서 보험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알고 보니까 저 같은 사람은 보험을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저는 고객이 부를 때 못 가잖아요. 공장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보험을 소개한 분께 책을 돌려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해요. ‘그런 마음이라면 보험을 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라고. 고객을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귀하다면서요.”
결국 대리점 시험에 응시하기로 한 이경화 본부장. 비록 자신이 고객에게 달려갈 수는 없었지만 시험에 합격하면 보험 상품만 다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으니, 바로 남편의 지인들이었다. 이경화 본부장이 보험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너도나도 보험에 가입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내 남편이 참 제대로 세상을 살았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한다면 보험이 우리 가족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얼마 후, 시골의 시댁을 찾은 두 사람. 시골에 살고 있는 시댁 식구들은 모두가 보험이 없었고, 덕분에 친척들 모두가 보험에 가입을 했다. 비수기에 잠깐 아르바이트하려고 설계사 자격을 취득한 이경화 본부장은 시험에 합격한 첫 달, 500만 원을 넘게 벌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험업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FC와 다를 바 없는 이경화 본부장의 소박한 책상
믿음으로 똘똘 뭉친 영업41본부 총무 팀원들
위기의 순간 <프라임에셋>을 만나다
언제까지 연고 영업만 할 수는 없는 법. 드디어 보험의 꽃인 개척 영업에 나서게 된 이경화 본부장. 무작정 병원에 가서 병실 문을 두드렸다.
“당시에 저는 의료실비보험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환자가 물어요. 인도에 나와 있는 소화전 구조물에 걸려서 넘어졌는데 보상이 어떻게 나오냐고요. 전혀 몰라서 대답을 못했죠. 이후에 환자들의 사례를 직접 들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경화 본부장은 개척 영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맥 빠지는 성적이지만 그녀는 병원 환자들에게서 직접 들은 정보들을 공부하며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개척 영업에서도 업적이 쭉쭉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누가 해도 의료실비보험이 잘 될 때였지만, 한번 개척 영업이 풀리기 시작하니까 계속 잘 풀리더라고요. 자신감도 생겼고,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건 한 건에 굉장히 집중하고 몰입했던 게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아요.”
하지만 잘 나가던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대리점의 업적이 한계에 봉착했고, 취급하던 손보 원수사 세 곳 중 두 곳을 잃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 이경화 본부장은 <프라임에셋>을 만났다.
남편과 함께 만든 본부
<프라임에셋>을 알게 된 이경화 본부장은 위기에 빠졌던 동료들을 수습했고, 생명보험을 팔기 위해 시험을 보고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경화 본부장은 남편 고행남 지사장을 본격적으로 보험업에 끌어들이게 된다.
“체육사가 너무 잘 되긴 했지만 십 년 뒤를 봤을 때에는 한계가 보이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그만두면 남자가 할 일이 뭐가 있나 고민을 했는데, <프라임에셋> 얘기 들어보니까 지사장도 될 수 있고, 본부장도 될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돈도 더 벌 수 있었고요.”
남편도 아내의 생각에 동의했다. 당시가 보험업으로 옮겨올 적절한 타이밍이라 생각했고, <프라임에셋>의 시스템이라면 체육사로 돈을 벌 때보다 훨씬 더 안정된 삶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남편이 결정을 금방 하더라고요. 한 시즌이라도 체육복을 더 팔면 좋았을 텐데 바로 가게랑 공장을 넘겨버렸어요.”
시작은 좋았다. 두 사람은 20여 년을 맞춰 온 완벽한 파트너십을 무기 삼아 6개월 만에 지사로 승급할 수 있었다. 남편은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리쿠르팅에 전념하고, 이경화 본부장은 보험영업을 하는 역할 분담 시스템. 이들 부부의 지사는 급성장의 고공행진을 이어갔는데… 하지만, 그 빠른 성장이 오히려 두 사람에게는 위기로 작용했다.
“당시 우리가 소속되어 있던 영업본부에서는 인증지사가 되면 본부사업장에서 나와서 독립사업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부 규약이 있었어요. 인증지사로 승급한 건 좋았는데, 너무 빠르게 승급이 이루어지다 보니 미처 우리 지사의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던 거였죠. 독립사업장을 갑자기 꾸리려니 앞이 막막한 거예요. 게다가 그 즈음에 제가 사고로 척추 수술을 받게 되어서 3~4개월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내부 규약에 따라서 보름 안에 독립사업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죠.”
결국 두 부부는 독립사업장을 만들었다. 사무실 유지에 들어가는 사업비는 한 달에 천만 원. 사업비가 흑자로 전환되기까지 기약 없는 긴 시간을 버텨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버텨보기로 다짐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고, 불과 6개월의 짧은 시간 안에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 엉뚱하게 찾아온 위기가 오히려 성공의 발판이 되어 준 것이었다.
“그 뒤부터는 변액 시험을 준비했어요. 언젠가는 본부장이 될 테니까요.”
남편과 함께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변액 시험을 공부하던 이경화 본부장. 그런데 그때 단체계약 건이 하나 터졌다. 순식간에 본부로 분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
“지사장들에게 목표치 확인하고, 독려하고, 계산해보니까 본부 승급이 가능했고, 남편이 밀어붙여서 실적을 맞췄어요. 어차피 부부가 함께 일군 지사였기에 남편이 변액에 합격하면 남편이 본부장을 하기로 했었지요. 그런데 남편은 떨어지고 저만 변액시험에 합격했죠.”
남편인 고행남 지사장은 기꺼이 아내에게 본부장직을 양보했고, 어쩔 수 없이 이경화 본부장이 본부운영의 책임자가 되었다.
“남편이 항상 옆에서 큰일들을 모두 해결해줬기 때문에 그동안 마음 편하게 일을 했었는데, 제가 본부장이 되어 있다는 게 마음에 부담이 큽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경영 철학
이경화 본부장은 본부를 어떻게 운영해야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여러 본부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의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영업4본부장인 고원준 이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다른 분들하고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분은 ‘아들본부’를 위해 ‘손자본부’를 도와준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들었던 것은 ‘손자본부’가 발생하면 ‘모본부’는 무조건 손해라는 얘기였는데,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고원준 이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분이 우리회사에서 가장 많은 본부를 분할하고,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는지에 공감했습니다.”
이경화 본부장은 고원준 이사의 얘기를 들은 이후 자신이 갖고 있는 조직의 아래를 탄탄하게 하는 경영 방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리고 41본부 영업 가족들의 결속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저희 식구들은 거의 이동이 없다는 걸 본사에서도 확인하실 거예요. 보험 많이 팔고 리쿠르팅 많이 하는 건 아직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똘똘 뭉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영업 가족들은 물론이고 총무 팀원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경화 본부장. 최고의 총무 팀이 존재할 수 있는 것 또한 본부 구성원 하나하나를 가족처럼 아끼고 챙기는 이경화 본부장의 따뜻한 리더십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본부 가족이 일을 해서 힘이 되면 결국은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직접 유치한 ‘자’를 돕든, ‘자’가 유치한 ‘손’을 돕든, 내가 돈을 버는 건 똑같거든요. 결국 무엇이 앞인가만 보고 가면 되는 거죠.”
사업을 할 때부터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성공을 만들어 내었던 이경화 본부장.
“본부장이 되면 일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함께 일하는 습관이 들어서요. 본부 식구들한테도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힘들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눠서 이겨나가자고, 함께 노력하면 분명 좋은 날이 있을 거라고요.”
본부 가족들과의 신뢰를 쌓으며 내실을 다진 이경화 본부장. 영업41본부의 가족들은 항상 성공 확률이 100%라는 믿음으로 근성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다. 이제 그 믿음과 근성의 힘을 바탕으로 쭉쭉 뻗어나갈 일만 남았다.
2022년 현재
이경화 본부장은 76본부, 140본부 2개의 본부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