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1년 5월 I 인터뷰 I 글 _ 이용지 기자 I 사진 _ 이금희 홍보팀장
영업20본부의 김성용 본부장은 한 때, 월 4억을 벌던 대박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가 보험과 진정으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부터 라는데… 성공의 정점을 향해 비상하던 젊은이가 행운과 좌절을 오가며 <프라임에셋>의 영업본부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원 없이 놀았고, 무모하게 게을렀다는 그의 파란만장 인생기를 들으면서 롤러코스터가 떠올랐으니, 안전바가 존재하는 김성용 본부장의 스릴 만점 롤러코스터에 함께 탑승해 보자.
‘만고(萬苦) : 모든 괴로움’
‘만고 땡 : 모든 괴로움은 이제 끝났다.’
주변 동료들은 그를 ‘만고 땡’이라 부른다. 고민도 걱정도 없이 하루하루를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데… 치열하게 덤벼도 이겨내기 힘겨운 세상 속에서 이런 느긋한 마인드로 어찌 <프라임에셋>의 본부장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긍정의 힘’을 언급했다. 작은 욕심과 손해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잘 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으로 먼 곳을 내다본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느긋한 태도는 젊은 나이에 너무 큰일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단다. 9시 뉴스의 사회면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는 김성용 본부장. 그의 인생에서 긍정의 바이러스를 심어준 굵직한 에피소드를 공개해보려 한다.
재테크에 눈을 뜬 중학생
1974년생인 김성용 본부장. 건설회사의 중역으로서 퇴임한 김성용 본부장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엔 거의 해외 건설 현장에 상주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와의 조우는 6개월에 한 번뿐이었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고 있는 단어는 ‘이사’라는데, 어머니와 함께 너무 많은 이사를 다녔기 때문이란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지금도 여행 갈 때 짐 싸는 건 달인 수준이에요. 정말 빨리 쌉니다.”
김성용 본부장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해외에서 보내온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하였다. 싼값에 빌라를 사서 리모델링을 하고 고가에 되파는 방법으로 꽤나 많은 돈을 모으셨다는 어머니. 가족들은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다니는 가족의 경제력은 점점 증가했다. 그의 어머니는 재테크에 밝은 분이었다. 주식에도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증권 거래소에도 드나들었다.
“1988년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개미’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때였어요. 그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객장에 다녔죠. 중2 때 증자, 배당 뭐 이런 단어들을 입에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나네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일까? 김성용 본부장의 어릴 적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었는데 눈 때문에 공군 사관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조종사가 안 된다면 돈을 많이 벌자고 꿈을 꿨죠. 고등학교 때는 ‘나이 삼십이면 차를 몇 대는 굴려야지’ 이런 공상을 했는데 직장인의 룰 속에 들어가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월급쟁이가 되는 건 지독히도 싫었다.
원 없이 놀아봤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먹었다는 김성용 본부장이지만 나름 학업 성적은 뛰어났다고 한다. 서울의 명문 대학인 서강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성용 본부장. 입학만으로도 안정적인 취업과 나름대로의 성공이 보장될 것만 같은 명문 대학이지만 그는 공부보다 다른 곳에 더 관심이 많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원 없이 놀았지요. 술을 워낙 좋아했고, 미친놈처럼 놀았던 것 같아요.”
그는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부동산 재테크였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니까 어머니는 ‘이젠 너도 다 컸으니까 알아서 살아라’면서 아버지가 계신 해외로 훌렁 떠나셨어요. 덩그러니 혼자가 됐는데 용인-수지 쪽 부동산 정보에 눈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 이사를 갔어요, 수지로.”
당시에 용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수지 1지구의 분양 우선순위를 받기 위해 수지 2지구로 먼저 이사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던 김성용 본부장. 당시 그의 나이 21세였다. 미래의 취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돈이나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의 재테크와 더불어서 술독에 빠져 살던 새파란 젊은이는 어떻게든 군대에 늦게 가려고 ROTC를 선택했다. 그리고 전남 진도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후방이긴 하지만 군 생활은 힘들었어요. 휴가를 한 번도 못 나왔거든요. 힘든 군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어컨 나오는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뭐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군 복무를 마친 김성용 본부장은 동 대학원 금융경제학과에 입학,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금융을 공부하게 된다.
대박 사업가의 추락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그의 촉각은 여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대학원 3학년 때 친구 한 명이 캐나다 여자랑 결혼을 했어요. 근데 임신을 했다고 캐나다에 출산하러 간다는 거예요. 그 한 마디가 제 인생을 뒤집어 놨죠.”
친구는 김성용 본부장에게 캐나다에서 애를 낳으면 주어지는 교육과 복지 혜택들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 설명했고, 원정출산으로까지 화제가 이어졌다.
“’캐나다가 참 좋은데 원정출산을 왜 미국으로만 가는지 몰라’라는 말을 들었는데 머리가 망치로 한 방 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번쩍했죠.”
당시에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원정 출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의 기회에 관심이 쏠렸다. 바로 인터넷으로 캐나다의 원정 출산에 대해 조사했고,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는 것에 더욱 고무되었다.
“수요가 있다면 제대로 된 공급을 만들어보자!”
학교를 휴학하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성용 본부장. 6개월을 상주하며 꼼꼼히 살피고 금액을 따져보니 삼천만 원이면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부모님한테 물어봤죠. 나 결혼할 때 뭐 해줄 거냐고. 전세자금 1억 원을 얘기하시기에 미리 달라고 떼를 썼지요. 사업한다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언론계의 친구를 활용해서 노이즈 마케팅까지 하면서 그는 단숨에 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 인터뷰가 쇄도하고 손님은 몰려들고 월 순수익은 놀랍게도 3억에서 4억을 넘나들었다. 너무나 빠른 시간 안에 초대박 아이템을 터뜨린 것이다.
“1인당 3천만 원을 받아서 2천만 원을 남겼는데, 신청한 사람 중에 연예인도 여럿 있었어요. 원정출산을 하려는 대기자가 줄을 섰었습니다.”
하지만 대박 신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당시 병역비리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했던 그의 원정출산 사업은 병역 회피용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갖 종류의 비난이 쏟아졌고, 정부에서도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처음 씌운 죄목이 ‘관광진흥법 위반’이었어요. 여행사가 아닌데 항공권을 알선했다는 거죠. 그래서 벌금 500만 원을 내고는 아예 여행사 사업자를 냈는데, 이번에는 정부의 공식 허가 업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를 사기 혐의로 몰아세우더라고요.”
서대문 경찰서에 구류까지 살아야 했던 김성용 본부장은 비난 여론과 정부의 압박 속에서 사업을 접었는데…
“모든 계약에는 약관이 있잖아요. 만일 원정출산 과정에서 저희의 사정으로 서비스를 못하게 되면 몇 배를 물어줘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다 물어주고 나니까 1억이 손해가 났더라고요. 그땐 앞이 좀 막막했어요.”
어머니에게 받은 사업 자금 1억 원을 날리고 빚 1억 원까지 떠안게 된 그. 그의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가장 바보 같았던 시절
곤경에 처한 그였지만 가족들의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왜 눈총 받을 사업을 선택했냐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어머니가 제 빚 1억 원을 갚아줄 테니 다시는 그런 일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셨어요. 토도 안 달고 바로 ‘네!’ 했죠.”
빚을 해결하고는 대학시절부터 교제를 해왔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사업 실패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직장도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덕분에 부부의 생활비는 항공사 승무원이었던 그의 아내가 벌어오는 것으로 충당해야만 했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는데, 직장 생활에 지쳐서 잠들어 있는 아내를 보니까 미안하더라고요. 제 몸 상태도 너무 안 좋아져서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때 김성용 본부장의 머리에 보험이 스치고 지나갔다.
“술김에 드는 생각이 자살해도 보험금이 나오나?”
다음 날 김성용 본부장은 보험 영업을 하는 선배를 만나 얘기를 나눴고, 얼마 정도 버냐고 물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 많이 버는 거예요. 그때 저한테 보여준 액수가 월 급여 3천만 원이었어요. 나는 연봉 3천만 원 받겠다고 면접 다니고 있는데.”
그의 마음은 보험 쪽으로 움직였고 바로 ING 생명에 영업 FC로 입사했다. 하지만 처음 접하는 보험 영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고영업을 하던 그에게서 친구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바닥나 버렸다. 거기에 실적이 떨어지니 SM이 심하게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수첩을 뒤져보며 왜 스케줄이 없냐고 다그쳤고, 급기야 수첩에 거짓 스케줄들을 적어 놓기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제가 살면서 가장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게 그때였던 것 같아요.”
만날 사람은 없고 회사에서는 압력을 넣고… 김성용 본부장은 아침에 출근 도장을 찍은 뒤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하루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게 가장 돈을 안 쓰면서도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다… 당시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었어요.”
목표 의식이 나를 바꾸다
2004년, 여전히 바보 같은 시절을 보내던 김성용 본부장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 든다. 생각도 안 했던 판교 아파트에 당첨된 것이다. 4억을 주고 아파트를 사면 10억까지 치솟았던 판교 아파트. 그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계약금 내려고 폐물 포함해서 집에 있는 건 다 팔았어요.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어지는 중도금이 문제였다. 대출받은 중도금은 계속 늘어나고, 이자 또한 백만 원을 훌쩍 넘겨버렸으니 판교 로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간절한 만큼 뚜렷한 목표의식이 생겼어요. 내가 어떻게든 이 집은 지켜낸다! 그때까지의 바보 같은 생활은 청산하고 정말 열심히 원서를 냈죠”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아직 그의 나이 서른. 어느 대기업의 기획조정실에 입사한 그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동료들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일주일씩 밤샘 작업을 하면서도 신이 났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2년 여가 흘렀고 2006년도에 그는 CJ 홈쇼핑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금융 전공을 살리고 능력만큼 돈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업무는 CJ 홈쇼핑의 DB에 남아 있는 보험 관련 고객들을 찾아가 재무설계를 해주고 보험 영업을 하는 것.
“예전에 ING 다니던 시절에는 만날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는데, 지금 회사에서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겠다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번엔 뭔가를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했고, 그때 제대로 영업을 배웠어요.”
지난날 한방에 큰돈을 벌기 위해 달려들었던 그의 모습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동시승격을 통한 성장의 발판
성실한 영업 사원으로 변신한 김성용 본부장. 하지만 CJ홈쇼핑은 얼마 후 보험 관련 사업을 정리했고, 당시 함께 일했던 영업 사원 모두 직장을 잃게 되었다. 회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새로운 상황. 김성용 본부장은 스스로 DB를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다.
“<알트윈에셋>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 동양금융증권 명함을 파서 갖고 다녔어요. 그 회사 다니는 선배하고 얘기를 해서 고객들 CMA 통장을 만들어주고 펀드 판매까지 해줬죠. 저는 DB를 확보했고 선배는 CMA에 펀드까지 팔았으니까 윈-윈이었죠.”
하지만 <알트윈에셋>에는 그가 원하는 상품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아쉬운 상황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CJ홈쇼핑에 함께 근무했던 지인이 <프라임에셋>과 영업4본부장인 고원준 이사를 소개해 줬다. 수수료가 높고, 운영이 투명한 회사. 2008년 9월, 그렇게 김성용 본부장은 <프라임에셋>의 가족이 되었다.
<프라임에셋>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의 성실함은 변함이 없었다. 공장 위주로 영업을 했던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지하철로 공장들을 훑었고, 자신의 노력이 그 이상의 수익을 가져오는 <프라임에셋>의 시스템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고원준 이사가 제공해 준 DB와 리쿠르팅 노하우 역시 그에게는 든든한 힘이 돼 주었다.
“CJ홈쇼핑에서 나온 동료들을 규합해서 팀을 꾸렸습니다. 흩어졌던 과거의 동료들이 <프라임에셋>에 함께 모였는데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지요.”
김성용 본부장의 팀원들은 당시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팀원들을 통제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팀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다시 홀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얼마 후, 김성용 본부장은 <골든브릿지>라는 GA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옛 동료를 <프라임에셋>으로 데려오게 된다. 바로 영업21본부의 조재우 본부장이다.
“제가 팀장이었을 때 조재우 본부장은 FC, 제가 지사장이 됐을 때 그는 팀장이 되어있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재우 지사장이 엄청난 성장을 하더군요. 저보다도 훨씬 더. 결국 조재우 지사장은 본부장으로 승격하게 되었고, 저는 동시 승격이라는 회사의 제도에 의해서 덩달아 본부장으로 승격을 하게 되었어요.”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한 조재우 당시 지사장은 본부장으로 승격됐고, 그의 유치자인 김성용 본부장 또한 동시에 본부장으로 승격됐다는 얘기다.
“조재우 본부장 덕을 본 건 사실이지만, 그분 때문에 본부장 됐다는 말을 듣는 게 무척 자존심 상했어요. 그래서 3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고, 결국 저도 영업본부다운 규모와 매출을 갖출 수 있었지요.”
나란히 20본부와 21본부의 본부장이 된 두 사람.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나누고 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21본부장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본부 분할하고도 내가 먹고살아’, ‘20본부장 나를 이 회사로 안내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나도 먹고살아”
<프라임에셋>에서 발견한 믿음
김성용 본부장은 지난 4년간 <프라임에셋>과 자신의 관계를 대변하는 단어로 ‘믿음’을 택했다.
“이 회사가 잘 될 거라는 믿음이 변한 적이 없어요. 그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이 회사 아니면 다른 회사 가지’ 이런 생각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회사는 커지면 커지지 작아지는 회사가 아니거든요. 이 회사에서 모두들 오래 봤으면 좋겠어요.”
파란만장 롤러코스터 인생의 종착역으로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김성용 본부장. 그는 지금 더 큰 성장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조바심 내지 않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회사에 대한 장기적인 기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2022년 현재
김성용 본부장은 21본부, 54본부 2개의 본부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