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12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_ <프라임에셋> 홍보팀
2010년 12월 현재, 위촉 FC 4000명. 연간 수수료 매출액 600억 원. 손보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며, 생보업계 5위 안에 포진해 있는 한국의 대표 GA <프라임에셋>. 이 회사에는 수수료 정산 업무를 총괄하는 경영관리팀과 자금 집행을 총괄하는 재무관리팀이 있다. 그리고 이 두 팀을 진두지휘하는 재경관리실장은 대기업에서의 오랜 경력과 안정적인 미래를 포기하고, 이윤 대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8년 전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송강임 실장이다.
11년간 다녔던 <메리츠화재>를 떠나서 2003년 1월부터 <프라임에셋>의 모든 회계관련 업무를 담당해 온 송강임 실장. 그녀가 있었기에 <프라임에셋>의 영업가족들은 항상 정확한 수수료를 제날짜에 받을 수 있었고, 그녀가 있었기에 회사의 자금은 항상 투명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수수료 총액이 5,000만 원을 넘지 않던 초창기부터 50억 원이 넘는 지금까지,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누구보다도 <프라임에셋>을 사랑했고, <프라임에셋>을 위해서 살아왔던 송강임 실장. 이제 지난 세월 속에 아로새겨진 그녀만의 이야기를 2010년의 마지막 계절에 <프라임에셋>의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본다.
<프라임에셋>, 그 미약한 시작
때는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1년. 당시 대한민국의 손보업계는 사활을 걸고 자동차보험 매출을 독려하던 시기였고, 각 보험사의 영업소장들은 매출을 확보하느라 연일 수수료 ‘베팅’을 하며 대리점들을 돌아다녀야 했다. 지금은 많이 받아야 20% 남짓인 자보 수수료가 당시에는 무려 30%를 훌쩍 넘었었다고 하니 보험 전쟁이 따로 없었을 게다. 이즈음 <메리츠화재> 영업소장으로 근무하던 이윤 대표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수많은 대리점 사장들을 만나고, 증원을 하고, 교육을 하며 소장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예 본인이 직접 보험대리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당시 영업소 총무로 재직 중이었던 정지연 총무(현 프라임에셋 업무지원실장)를 본인이 계획했던 보험대리점의 직원으로 스카우트하였다. 당시 스물여덟 살의 정지연 실장은 이렇게 하여 9년여간 안정적으로 근무했던 <메리츠화재>를 그만두고 <프라임에셋>의 첫 직원이 된다. 당시 이윤 대표는 여전히 <메리츠화재>의 소장으로 근무 중이었기에 <프라임에셋>이라는 법인대리점은 아직 실재하지 않은 상태. 첫 시작은 정지연 실장 명의로 개인대리점을 여는 것이었고, 정지연 실장은 당시 이윤 대표가 영업소장으로서 관리하던 모 대리점에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하나를 빌려서 최초의 영업을 개시하였다. 2001년 10월의 일이다.
<프라임에셋(당시 프라임인스넷)>은 이듬해인 2002년 5월이 되어서야 서울 성수동의 작은 오피스텔에 책상 두 개를 놓고 법인대리점으로 출범하게 된다. 당시에도 이윤 대표는 여전히 <메리츠화재>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기에 처음에는 이용진 부사장 명의로 회사가 설립되었다. 당시 손보업계의 수수료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덕분에 대리점들은 높은 수수료를 받는 호황을 누렸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프라임에셋>도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업비를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손보업계는 2002년 하반기부터 경쟁적으로 수수료를 낮추기 시작하였고, <프라임에셋>처럼 자기 실적이 아닌 남의 실적으로 수수료 차익을 보던 대리점들은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윤 대표는 <프라임에셋>에 계약을 넣었던 대리점들에게 약속했던 지급률을 지키기 위하여 여기저기서 많은 돈을 빌려야만 했고, 이는 결국 한 가정의 경제적 몰락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카드를 연체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해 봤겠지만, 연체 액수가 많거나, 연체 일수가 길어질수록 채권추심은 견디기 힘들 만큼 혹독해진다. <프라임에셋>을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윤 대표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내몰렸고, 급기야 <메리츠화재>를 계속 다닐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미 수억 원 대로 불어난 채무와 그에 대한 이자. 그리고 약속을 지킨다는 신념 하에 원수사로부터 받는 것보다 더 지급되어야만 했던 <프라임에셋>의 수수료 체계. 그리고 직원 급료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소장으로서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때, 이윤 대표에게 남은 것은 <프라임에셋>이라는 빚투성이 대리점과 그를 믿고 따라와 준 정지연 실장에 대한 책임감뿐이었다.
저는 이미 <프라임에셋>의 직원입니다
<메리츠화재>를 연말까지만 다니고, 2003년부터는 혼신의 힘을 다해 <프라임에셋>을 성공시켜야겠다고 다짐
을 하던 이윤 대표는 곧 엉뚱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정지연 실장이 둘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하여 2003년 1월부터는 장기간 휴직이 불가피했던 것. 이윤 대표에게는 정지연 실장을 대신하여 <프라임에셋>을 감당할 직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메리츠화재>라는 든든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정지연 실장처럼 본인을 믿고 대리점으로 이직할 총무가 과연 누가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본인과 가깝게 지내던 동료 영업소장의 배우자이며, 같은 지점에서 3년 여간 함께 생활을 해왔던 송강임 실장이 바로 그 답이었던 것. 문제는 어떻게 그녀를 <메리츠화재>에서 빼 오느냐다.
“사장님이 아직 <메리츠화재>에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어느 날이었는데, ‘정지연씨가 출산휴가를 떠나게 되니 대리점을 맡아달라’고 제안을 하셨어요. 하지만 정중히 사양을 했었지요. 당시에도 대리점은 경영난으로 문 닫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익히 예견된 대답이었지만 이윤 대표는 얼마 후 그녀에게 다시 제안을 한다. 급여도 300만 원 이상 지급할 것이고, 출근은 10시로 늦추어 줄 것이고, 아이들 육아에 필요한
휴가는 언제든 마음대로 써도 되고 기타 등등.
당시 그녀에게 가장 큰 애로사항 중의 하나가 바로 육아였다. 대기업을 다니고 있었으니 아이가 아파도 업무 시간 중에 병원 한 번 데리고 갈 수가 없었고, 아침마다 서울의 서쪽 끝인 구로에서 동쪽 끝인 강동까지 출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부부가 함께 맞벌이를 하는 입장에서 직장의 안정성은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거절하는 게 미안해서 그녀는 ‘소장님이 <메리츠화재>를 그만두고 대리점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시게 되면 그때 갈게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설마 안정적인 급여가 보장되어 있는 <메리츠화재>를 그만두고 미래가 불안정한 대리점 사업에 ‘올-인’할 줄은 상상도 못했었죠. 대리점은 그냥 세컨드-잡으로 유지하리라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 이윤 대표는 그녀 앞에서 <메리츠화재>에 제출할 사직서를 흔들어 보이며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송강임 실장을 압박했고, 그녀는 결국 그녀가 약속한 말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메리츠화재>를 떠나게 되었다. 2002년 12월의 일이다.
“<프라임에셋>으로 오기 전, <메리츠화재> 1년 후배이기도 했던 정지연 실장에게 거듭해서 물어봤었지요. ‘지연아, 나 정말 거기 가도 되니? 회사 정말 괜찮아?’라고요. 그랬더니 정지연 실장은, ‘언니 괜찮아요. 이윤 사장님 스타일 잘 아시잖아요. 빨리 오세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해서 결국 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암담했어요. 실적은 점점 줄고 있었고, 수수료 지급은 제날짜에 나가는 곳이 몇 군데 없었어요. 억울하고 화가 난 마음에 정지연 실장에게 전화를 해서, ‘지연아, 회사 상태가 이 모양인데 너는 왜 나한테 사실대로 말을 안 한 거니?’라고 묻자 정지연 실장은 ‘언니! 수수료랑 재무 사항은 사장님이 직접 챙기시기에 저는 잘 몰라요. 저는 그냥 업무만 처리하고, 월급만 꼬박꼬박 받았는걸요.’ 하는 거예요.
월급을 꼬박꼬박 받았다는 대답이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저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이윤 사장님과 정지연 실장의 ‘작업’에 제가 보기 좋게 당한 거였어요. 하지만 후회한들 어쩌겠어요? 저는 이미 <메리츠화재>의 직원이 아니라 <프라임에셋>의 직원인걸요. 하하하.”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작품이 있다. 말 그대로다. 좌충우돌 복잡한 상황이 그려지지만 결국 끝이 좋으면 과거에 아무리 힘들었던 과정도 행복한 추억이 된다는 줄거리다. 우리네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처음에 사장님은 300만 원의 급여를 약속하셨지만, 회사 사정이 너무 힘들어지자 얼마 되지 않아 200만 원으로 내렸어요. 그러다 결국 150만 원으로 또 내렸답니다. 2003년 당시에는 저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사장님에 대한 원망이 정말로 많았었어요. 급여를 깎으시면서 언젠가 반드시 그 차액은 몇 곱절로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전 꼭 그렇게 하시라고 했지만 그 약속이 정말로 지켜지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지요.”
당시의 후회와 원망을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었을까? 송강임 실장처럼 업무와 재무 모든 부문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이는 직원은 얼마든지 다른 대리점에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루는 정 안되겠다 싶어서 사장님께 이직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려울 때 같이 있었는데, 고생만 시키다 지금 내보낼 수는 없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회사가 잘 되면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해주고 싶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왠지 모르게 그 말씀의 진실성이 가슴 깊이 새겨지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한 번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계속 있었지요.”
지금 들어도 감동적인 에피소드다. 하지만 어쨌든 영업환경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여름이 되자 출산휴가를 끝낸 정지연 실장도 복귀를 하였고, 회사의 살림은 더욱 빠듯해졌다. 더 이상 오피스텔에서의 법인 운영에 한계를 느낀 이윤 대표는 결국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로 한다. 그 해 가을에 보험회사의 임차 지원을 받아서 현재 본사가 위치한 광장동 사업장의 일부를 임차하게 된 것. 광장동의 새 사무실에는 지금의 영업3본부장인 허연희 이사를 중심으로 하는 TM사업부와 본인이 직접 운용하는 대리점 사업부를 만들었다. 동시에 회사를 좀 더 시스템적이고 안정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이용진 부사장이 정식으로 <프라임에셋>에 참여하게 된다. 2003년 10월의 일이다.
성장을 위한 희생, 그리고 사람들
지난 허연희 이사 와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회사는 2003년 내내 최악의 영업환경을 견뎌내야 했고, 2004년 1월에는 최종적으로 도산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고, 이후 꾸준한 성장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성장을 하다가 망한 기업이 한두 곳이 아닐 터. <프라임에셋>은 무려 6년 이상을 한결같이 성장을 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GA가 되었다. 그동안 광장동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2004년만 해도 회사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송강임 실장을 포함한 회사 전체의 업무팀 직원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녀는 당시 업무팀장을 겸해서 재무업무도 담당했지만, 업적이 증가하면서 수수료 정산에 매달리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는 송강임 실장이 수수료 관련 업무만 할 수 있도록 2005년 봄에 재무팀을 신설하였다. 송강임 실장은 재무팀장이 되었고, 업무팀장은 정지연 실장이 맡게 된다. 재무팀장이라고 해 봐야 그녀 혼자다. 당시 정산 업무에 대한 송강임 실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것을 엑셀로 처리하던 시절이었죠. 당시만 해도 회사는 대리점 연합체의 형태이다 보니, 각 영업본부마다 수수료 지급 방식이 천차만별로 달랐어요. 저 혼자서 수수료 정산을 할 때는 야근도 부족해서, 남은 일을 집에 가져가서 업무를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지요. 그러다가 수수료 지급일이 다가올 때는 아예 출근도 포기하고 집에서 밤낮으로 정산을 할 때도 많았어요. 그럴 때면 육아와 집안일은 모두 남편 몫이 되었고요.”
수수료 지급일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고 수수료 정산을 하며 버티던 수많은 시간들. 그 시간을 온전히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회사의 성장이 곧 스스로의 성장이라고 느낄만한 믿음과 주인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래전 그녀 혼자 담당하던 수수료 정산 업무는 이제 경영관리팀 여덟 명의 직원들이 처리하고 있으며, 회계업무 또한 세 명의 재무관리팀 직원이 담당하고 있다. 그녀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며 성과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특별히 고마워하는 직원들이 있다. 수년간 그녀를 도와서 수수료 정산 업무를 감당했던 윤예원, 권수정, 남미영 사원이 바로 그들이다. 본인 만큼이나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면서 헌신적으로 책임을 다했던 세 직원들에게는 지금도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라는 송강임 실장. 그녀에게서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 또 한 분 있으니,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
송강임 실장이 바쁠 때마다 그녀를 대신해서 집안 일과 육아를 책임졌던 그녀의 남편은 현재 영업7본부장으로 재직중인 김진필 이사다. 김진필 이사는 <메리츠화재>에서 이윤 대표와 함께 한 솥 밥을 먹으며 친한 동료애를 나누던 동갑내기 영업소장이었다. 송강임 실장을 먼저 <프라임에셋>으로 보내고, 본인은 여전히 영업소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즈음에 건강상의 이유로 <메리츠화재>를 퇴사하게 되었다. 이후 <프라임에셋>에 와서 자유롭게 조직영업을 하더니 얼마 안 가서 영업본부장이 되었고, 결국 영업이사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꼼꼼함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하는 영업가족에 대한 세밀한 관심과 배려가 영업 7본부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믿음을 지킨 선택, 그리고 그 가치
2010년이 저물어 간다. 12월이 지나면 송강임 실장은 <프라임에셋>에서 근무한 지 만 8년을 채우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회사에는 몇 번의 재무적인 위기가 있었느냐고 묻자 그녀가 웃는다.
“회사가 실질적으로 영업이익을 본 시점은 2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회사의 외형과 상관없이 항상 수수료 지급일을 맞추기 위해서 어디선가 돈을 차입해야만 했거든요. 처음에는 회사의 신용도가 없었기에 아주 높은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개인적인 차입이 주를 이루었었죠. 그러다가 서서히 회사의 업적도 증가하고, 신용도가 많이 올라가니까 보험사로부터 대출이 가능해지더군요. 비록 총체적인 부채는 늘어났어도 회사의 성장이 그 이상이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지요.”
보험사로부터 대출을 받기 전에는 수수료 지급액을 맞추기 위하여 송강임 실장을 포함한 주요 간부들의 신용카드는 항상 ‘카드론 대기 상태’였다고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을 반복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회사와 스스로를 믿고 견뎌 온 세월이 참으로 대단하다.
어느덧 회사는 영업이익을 통하여 보험사의 부채도 모조리 상환을 하였고, 지금은 부채 ZERO의 견실한 기업이 되었다. <프라임에셋>처럼 외부 차입금 없이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초대형 GA는 몇 안 된다고 하니, 이들이 만든 성과가 정말 놀라울 뿐이다.
기자는 사보를 제작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프라임에셋>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기자가 느낀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가 ‘영악하지 않다’는 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기자가 만나보았던 사람들-대표이사로부터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업본부장으로부터 FC에 이르기까지-은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믿음과 신뢰를 지키는 행동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들은 과거의 선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본인의 업무를 더 열심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송강임 실장의 경우, 수천만 원의 수수료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수십억 원 대의 수수료를 총괄하지만 그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항상 끊임없이 공부를 한다. 완벽한 회계 처리를 위하여 일반적인 회계 항목과 보험대리점의 적합성을 찾아내는 노력을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고 있는 것. 송강임 실장뿐이 아니라, 인터뷰에서 소개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다. 다른 대부분의 조직처럼 ‘내가 옛날에 어떠했으니까’, ‘내가 일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내가 본부장이니까’ 등등, 스스로가 잘났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을 이 회사에서는 본 적이 없다. 때문에 기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만든 <프라임에셋>의 조직 문화에 정말 많이 놀랐었다. 기자는 이제 <프라임에셋>이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 1등 GA가 되었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오직 궁금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회사에 몇 %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선택한 믿음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제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은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죠”
송강임 실장의 말처럼 우리는 항상 자기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때,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는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만일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송강임 실장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과 신뢰를 가장 중요한 선택의 가치로 여긴다면, 당신도 이미 성공의 길에 올라섰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