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8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_ <프라임에셋>홍보팀

“행복이란 본인이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것이 행복인 것 같아요” 34세의 당찬 그녀. 포기와 절망, 실패란 단어는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주지 못한다. 내 생애 마지막 회사라는 신념으로 선택한 <프라임에셋>. 입사를 위해 두 번씩이나 입사지원서를 쓴 손보업무팀 김경아의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승무원의 날개를 접다
<프라임에셋> 손보업무팀 김경아 사원.
그녀의 고향은 전라남도 여수다.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던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항공운항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1998년은 우리나라가 IMF에 경제주권을 내준 특수한 시기였다. 어느 항공사도 신입 승무원을 뽑지는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여의 기간 동안 그녀는 승무원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고군분투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듬해 봄, 부모님의 지인을 통하여 <전국화물자동차 공제조합>이라는 직장에 입사하였고, 손보 사업부라는 생소한 업무 부서에 배치받아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자동차보험 업무를 하던 그녀는 입사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보험 업무를 하기에는 아직 승무원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2년간 그녀는 수많은 국내외 항공사에 취업 원서를 넣으며 승무원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국내보다는 외국 항공사에 입사하기 위해 어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어학 자격증도 취득했다. 최종 면접까지 간 곳도 몇 군데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과는 항상 불합격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그녀의 나이는 20대 중반을 넘어버렸고, 항공업계의 특성상 이제는 승무원으로서 서류전형조차 힘들게 되었다.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녀에게 난생처음으로 ‘포기’, ‘실패’라는 단어가 가슴에 새겨졌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길은 엉뚱한 곳에서 열렸다. 외국 항공사에 입사하기 위하여 수많은 어학 자격증을 취득한 결과, 그녀는 <중앙일보 시사미디어>의 경영지원팀에 입사하게 되었다. 뉴스위크, 포브스 등 중량감 있는 시사잡지를 발행하는 그곳에서 그녀는 특유의 자신감으로 업무를 소화해나간다.
<시사미디어>에서 일을 하던 중,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국가공무원이었는데, 그와 연애를 하면서 그녀는 공무원과 같은 평생직장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시사미디어>에서의 일은 무척 쉬웠어요. <중앙일보>사가 모기업이다 보니, 다른 출판 잡지사처럼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서 일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급여도 나름 충분했고, 업무 분위기도 자유로웠습니다. 여섯 시만 되면 다들 칼퇴근을 했기에 4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업무가 힘들다고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현재의 편한 직장이 아니라, 평생 동안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중요한 화두가 되어 있었다. 평생직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사미디어>는 여직원의 결혼과 출산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시험 준비를 위하여 4년여 만에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후회한 적은 없었어요. 어차피 그곳에서는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거든요. 기왕 그만둘 회사라면 언제 그만두어도 마찬가지니까, 좀 더 일찍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2006년 5월에 <시사미디어>를 그만둔 그녀는 이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몰두한 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8년 3월. 그녀는 남자친구와 3년여의 연애생활을 마감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딸이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것을 항상 염려하셨던 부모님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지만, 3년여의 연애기간 동안 확인할 수 있었던 배우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갔다 온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저는 원래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지요. 그리고 열심히 했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한결같은 격려는 제게 가장 큰 위안이었거든요.”
시험 결과는 항상 아쉬웠다. 늘 간발의 점수 차로 그녀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아무리 꿈을 향한 열정이 큰 그녀였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3년여 시간 동안 할 만큼은 했다. 최선을 다한 기간이었기에 결국 미련 없이 책을 놓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제 서른세 살의 그녀에게는 마지막 선택이 남아있었다. 전업주부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평생직장을 찾던지.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IMF 10년의 세월이 가져온 한국 사회의 변화는 컸다. 한국 사회의 취업구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상과 동떨어져 공부만 했던 그녀에게 재취업의 벽은 너무 높았다. 그녀는 많은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가고 싶은 회사는 오라 하지 않았고, 오라 부른 회사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듯 수 많은 회사를 찾던 그녀에게 2009년 5월 즈음, <프라임에셋>의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채용공고를 클릭했는데, 아주 간단한 문장만 있었어요. ‘정규직 사원 모집, 열정을 가진 사람만 지원 요함’이라고요. 업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었고 단지 손보업무팀, 행정지원팀 등의 부서 명칭만 있더군요. 저의 첫 직장에서의 업무가 손보업무였기에 대충 어떤 업무인지 감이 잡히더라고요. 채용공고가 너무 간단하게만 나와 있어서 별다른 기대 없이 회사의 홈페이지를 클릭했는데, 깔끔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홈페이지를 보고 기본이 충실한 회사라고 느꼈습니다. 회사의 각종 경영지표를 가감 없이 공시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무엇보다도 홈페이지 곳곳에 쓰여있는 ‘열정과 도전’이라는 문구가 제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꼭 면접을 보고 싶은 회사라고 생각했고 이력서를 제출했지요.”
채용공고가 간단한 회사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아주 훌륭해서 자신감이 있는 회사든지, 아니면 아주 형편없어서 쓸 말이 없는 회사든지. 어쨌든 그녀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프라임에셋>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서 회사에 왔는데, 모든 직원들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직원들의 인상이 다들 너무나 밝았습니다. 이전에 면접 본 회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꼭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습니다.”
김경아 사원의 면접을 진행했던 이용진 부사장은 이렇게 기억한다.
“질문에 대하여 막힘이 없었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면접에 임하였지요. 대개 늦은 나이에 신입 사원으로 지원하게 되면 조금은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면접에 임하게 되는데, 김경아 사원은 눈을 씻고 봐도 미안해하는 감정이 없더군요. 마지막 대화 중에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봤는데 이렇게 답하더군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어딜 가도 똑 소리 나게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 뽑았지요.”
탐나는 인재이긴 했지만, 나이에 대한 부담감을 무릅쓰고 굳이 뽑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떤 회사를 가더라도 훌륭하게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을 것이기에 나름대로 잘 살겠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 첫 번째 도전에서는 탈락했지만, 그녀에게는 <프라임에셋>에 대한 인상과 애착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프라임에셋>만한 회사를 찾고자 했지만 쉬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던 몇 달 후, 회사의 채용 공고가 다시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주저 없이 두 번째 이력서를 밀어 넣었다. 이력서를 넣고 열흘쯤 지났을까?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내심 포기하던 그녀에게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면접은 지난번에 봤으니 생략하고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라는. 2009년 7월 1일의 늦은 오후에 걸려온 그 전화는 그녀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녀는 <프라임에셋>의 직원이 되어있었다.

한 번 더 날아 보자꾸나.
그녀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고, 10여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서 다시 손보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물론 10여 년 전의 자동차보험이 아니라 장기보험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손보업무팀은 장기보험에 대한 계약관리가 주된 업무이다. 팀장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직원들이 월 4억원 정도의 신계약을 담당한다. 말이 여섯 명이지 인턴사원 두 명과 총괄 기획실무를 담당하는 팀장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세 명의 직원이 업무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셈이다.
‘업무가 벅차지는 않은지, 업무 중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냐’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송아지처럼 큰 눈을 깜박깜박거린다. 그리고는 ‘별로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한다. 기자는 그녀의 별명이 왜 ‘김 군’인지를 알듯했다.
직원들 사이에서 그녀는 ‘김 군’으로 불린다. 몇몇 직원들은 ‘그녀 안에 남자 있어요’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는다. 알만하다. 섬세하게 생긴 그녀의 외모와는 정반대로 그녀 안에는 정말로 우직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곧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그녀의 태중에는 7개월 된 남자 아기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태명이 뭐냐고 묻자 복둥이란다. 그녀의 태 안에 있는 아이가 복둥이라면 그녀 또한 <프라임에셋>의 복둥이가 틀림없다. 김경아 사원처럼 보험에 대한 아무런 경력 없이 입사하게 되면 보통 2~3년 정도의 주니어 사원과 3~4년 정도의 시니어 사원을 거쳐서 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정확하게 입사 1년 만에 시니어로 승진하였다. 그녀의 업무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증명하는 얘기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의 복둥이다.
2009년 7월 초에 그녀와 함께 입사한 6명의 동료는 불과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그만두었다. 당시는 법인전환 직후의 시점이라 회사의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었다. 그녀에게는 온전히 감당할 정신력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동료들은 아니었다. 한 직장에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곳을 평생의 직장으로 삼을 수 있다는 확신을 깨닫기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직 스스로의 꿈을 정립도 못한 상태에서 잠깐 동안의 경험으로 회사가 힘들다며 그만둔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아쉽다고 한다.
하버드대학교의 성인발달 연구에 따르면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은 ‘고난을 대처하는 자세’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간관계’라고 전한다. 손보업무팀 김경아 사원. 그녀는 힘든 과정을 긍정적으로 잘 극복했고, 주위에는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프라임에셋>의 직원으로서 회사 자랑 좀 해달라는 요청에 그녀는 곧바로 ‘사람’이라고 답한다.
“제 짧은 경험으로는 사실 일보다는 사람이 좋아서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프라임에셋>은 불과 1년의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친정 같은 곳이랍니다. 동료들끼리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거든요.”
대학 졸업 후 10여 년이 세월이 흘렀다. 꿈을 향한 5년의 도전 기간이 있었고 비전 없이 다녔던 5년의 직장생활이 있었다. 평생직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 4년이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던 그녀. 그런 그녀가 ‘재수’ 끝에 찾은 곳은 결코 신기루가 아니었고, 오늘도 국내 최대 GA로서 매일매일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프라임에셋>이다.
<프라임에셋>의 당당한 시니어 사원으로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회사에는 아직 정년퇴직의 개념이 없다고 합니다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순 살까지는 일을 할 겁니다. 이 회사에서.”
2020년 현재
영업지원팀에서 수석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 세월이 흐를수록 업무능력은 더해갔고 한 팀을 대표하는 책임감 또한 자라났다. <프라임에셋>의 모든 영업가족들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담당하며, 여전히 사람의 소중함을 실현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