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6월 I 인터뷰 I 글_이금희 홍보팀장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성공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프라임에셋의 사보를 창간하면서 기자가 처음 만나는 인터뷰이 고원준 이사. 창간호의 첫 인터뷰이로 선정된 만큼 그에게는 뭔가 특별함이 있었다.
마흔의 나이에 그가 일구어 놓은 그만의 영역. 그러면서도 결코 잃지 않는 겸손함. 기자에게 겸손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세상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회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겸손함을 말함이다.
팀장님 그거 아세요? FC들은 ‘앵벌이’예요!
2005년, 서울의 동쪽 끝 광장동에 위치한 보험대리점 프라임에셋은 지극히 작은 회사였다. 업무지원을 해주던 열 명 남짓의 스태프들, 여러 대리점을 다니며 자보 계약을 모아오던 서너 명의 본부장, 그리고 주로 자동차보험만 취급하던 스무 명 남짓의 FC들이 있었을 뿐이다. 사장이라는 명함을 파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이윤 사장은 ‘실장’으로 불리었고, 이용진 부사장은 ‘팀장’으로 불리었다.
2005년 8월 19일, 금요일이다. 업무를 마감하고 이용진 부사장은 스태프들과 함께 워크샵을 떠났다. 지금은 관광버스 몇 대를 대절해서 가지만 당시에 필요했던 것은 승용차 두대였다. 이용진 부사장은 사무실에서 나름 안면이 있고 승용차를 가지고 있던 고원준 FC에게 함께 워크삽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별로 할 일도 없었던 고원준 FC는 혼쾌히 떠나기로 한다.
목적지는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가는 도중 홍천의 어느 펜션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하였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밤이다. 두 대의 승용차에는 6명의 여직원이 동승하였고, 늦은 밤 펜션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불을 피우고 바베큐로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술이 돌았고, 서로 이야기 꽃을 피운 지 한 시간 여쯤 지났을까?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나서 당시 고원준 FC는 갑자기 이용진 부사장에게 격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그거 아세요? FC들은 ‘앵벌이’예요!”
“…”
갑자기 찾아온 적막. 직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이 당황스러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부사장은 직원들을 펜션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고원준 FC와 마주 앉아서 단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술을 마시다가 분에 겨워서 소리를 지르고, 울고, 흐느끼고, 다음날 되면 잊어버리고… 우리가 술자리에서 익히 경험하는 풍경들이다. 그러나 2005년 여름의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 홍천의 펜션에서 시작한 둘만의 이야기는 이후 모두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버렸다. 나비효과처럼..
가난한, 그러나 꿈 꾸었던 시절
1971년 인천에서 출생한 고원준 이사.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가난 그 자체였다. 세탁소를 운영하셨던 아버지는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때는 70년대다. 60년대의 보릿고개 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먹고 사는 게 문제였던 시절이다. 학교만 끝나면 바로 책가방을 던져놓고 동네 애들과 뛰어 놀기 바빴던 고원준 이사. 어린 시절 그와 함께 뛰어 놀던 사람 중 유명인이 있으니 바로 방송인 ‘배칠수’다. 고원준 이사의 결혼식 사회도 봤던 배칠수는 지금도 여전히 고원준 이사와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고원준 이사의 어린 시절, 그의 모든 기억의 배경은 산과 들, 그리고 골목길이었다. 집은 해가 져야 기어 들어가던, 낯선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인천에서도 정말 ‘꼴통’들만 다니던 공고가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지라 자연스럽게 그 학교로 진학했지요. 칠수랑 같이요.”
고원준 이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군에 입대를 한다.
“제대 즈음에 선임하사가 정말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말뚝 박으라고요. 그런데 왠지 사회에 나가면 더 좋은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대를 했지요.”
사회에 나와서 그가 한 일은 대학을 가는 거였다.
“고졸 학력보다는 아무래도 대졸 학력이 더 많은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없는 돈이지만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인천의 한 전문대학교 사회체육학과에 진학을 하게 된 고원준 이사. 대학을 졸업한 그는 유아체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인이 되었다.
“유치원마다 체육행사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곳에서 체육활동을 지도하는 거였지요. 당시에도 지금처럼 꽤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네요. 하하.”
7년을 했다. 그런데 별로 재미가 없다. 돈을 못 벌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늙으셨기에 집안의 가장 역할은 그의 몫이었지만 유치원 체육교사로 버는 돈은 정말 적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1998년 IMF의 위기와 함께 대한민국에는 벤처기업의 열풍이 불게 된다. 수 많은 닷컴 기업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대박을 터트린 벤처기업들이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던 때였다. 때마침 여기저기에서 해적방송처럼 등장한 인터넷방송국이 있었다. 지금은 유명인이 된 김구라, 배칠수 등도 모두 이 시기에 인터넷 방송을 타고 이름을 알린 사람들이다. 고원준 이사도 배칠수와 함께 렛츠뮤직이라는 인터넷 음악방송국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한 2년 반정도 했지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딱 한가지, 돈 버는 것 빼고요.”
돈을 벌어야 했던 고원준 이사가 새롭게 선택한 것은 보험이었다. 그래서 2003년 2월, AIG 생명보험의 FC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보험영업, 그리고 좌절
새로운 직업을 선택한 고원준 FC. 처음 얼마간은 열심히 했다. 그런데 보험영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다이어리에다 쓸데없는 가짜 스케줄을 적어서 매니저에게 보고하고, 고객 만난다면서 사무실을 나와서 시간을 때우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었어요. 명동 같은데 쭈그리고 앉아서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한 적도 많지요.”
예쁜 여자 구경하는 동안 눈은 즐거웠는지 모르겠으나, 지갑은 점점 얇아져만 갔다.
“월 평균 100만원 정도의 소득이 있었어요. 그걸로 차량 할부금 내고, 기름 값, 밥 값, 카드 값, 그런거 쓰고 나면…”
때론 카드깡도 하고, 두세 개의 카드로 돌려막기도 하면서 아무 대책 없이 근근히 빚으로 생활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그의 매니저가 본인은 AIG를 떠나서 프라임에셋이라는 GA로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메니저를 따라서 프라임에셋으로 함께 온 FC는 둘. 지금은 24본부를 이끌고 있는 문주원 본부장과 4본부장인 고원준 이사다. AIG에 잔여수당도 거의 없었던 고원준 이사는 어차피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2005년 2월 고원준 이사는 매니저를 따라서 프라임에셋으로 왔다. 그의 나이 35세 때다.
프라임에셋은 2004년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자보 전문대리점이었다. 자보계약을 통해서 아주 작은 수수료 차익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던 법인이었지만, 아주 작은 성장의 발판은 마련한 상태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생명보험이었다.
당시 어느 본부장의 소개로 가끔 회사에 와서 FC들을 대상으로 생보교육을 진행했었던 매니저는 AIG 내부에서의 갈등 때문에 프라임에셋을 선택했다.
매니저를 따라서 무턱대고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고원준 이사.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그는 무엇이든 삶의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었고, 결국 프라임에셋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소가 바뀌었다고 신통치 않은 보험영업이 잘될 리가 만무하다.
옛날처럼 명동에 나가자니 서울의 동쪽 끝에 있는 광장동에서 명동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차를 닦는 거였다. 당시 SM3를 타고 다니던 고원준 이사는 매일같이 차를 닦았다. 닦고 닦고 또 닦았다.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반년 정도가 흘렀다.
“저는 처음에 부사장님이 그냥 컴퓨터나 고치고, 사무실의 시스템이나 관리하는 직원으로 알았어요. 사장님과 형제인 줄은 정말 몰랐었지요. 그러다가 바람이나 쏘일겸해서 워크샵을 따라간 거였는데, 술이 좀 들어가니까 갑자기 회사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어요.”
당시 회사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었다. 그냥 할 일 없이 매일 차나 닦는 사람 정도로 인식되던 고원준 이사.
“부사장님은 저에게 그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셨었지요. 더 이상 능력도 안 되는 개인영업에 미련을 두지 말고, 개인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조직영업으로 말이지요.”
부사장과 많은 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회사에서도 자기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했다. 거기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부사장이 고마웠을 것이다. 전날의 억수 같은 비는 다음날이 되자 말끔하게 그치고 더 할 나위 없는 찬란한 태양이 그를 감쌌다.
“인제 내린천 입구에는 번지점프대가 있었는데, 부사장님이 거기에 차를 세우더니 다들 뛰자고 그러시더라고요. 전 그런 거 정말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밤 사이에 저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 졌어요. 까짓거 뛰자라고 결심하고 몸을 날렸습니다.”
오후 내내 래프팅을 한 일행은 내친김에 한계령을 넘어서 속초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닷가 방파제에서 바닷 바람을 맞았어요. 정말 세찬 바람이었는데… 그 바람을 맞으면서 제 머리 속에 남아 있던 모든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날아가버리는걸 느꼈습니다. 왠지 새로운 인생에 도전한다는 기대와 설레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
새로운 시작
그는 부사장의 추천으로 당시 회사에서 리쿠르팅을 제일 잘한다는 2본부의 소속이 된다.
“저는 처음부터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각종 약속을 보고 처음에 놀란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수 많은 약속을 잡고 미팅을 하면서 성장을 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요.”
고원준 이사가 처음에 한 일은 전화번호부를 탐독하면서 전국의 보험대리점 주소를 정리하여 회사소개서를 발송하는 것이었다. 수십만 원어치 우표를 사서 매일 우편물을 보내는 그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한다. 차라리 차를 닦지…
우편물로는 부족하다. 이메일로도 보냈다. 매일 수백 통의 이메일을 보내면서 조금씩 성과도 있었는데…
“어느 날 본부장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고원준씨는 나를 믿소, 회사를 믿소? 저는 당당하게 회사를 믿는다고 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때부터는 저를 멀리하더군요.”
당시 회사 전체 실적의 절반 정도를 하던 2본부 본부장은 본인보다 회사를 더 신뢰한다는 고원준 이사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2006년 초, 이용진 부사장은 밸류체인의 기본골격을 완성하였다. 당시는 본부의 규모가 작았고 지금처럼 조직구조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단순히 실적 기준을 달성하면 본부가 분할되는 형태였다. 고원준 이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2본부 본부장은 본인보다도 회사를 더 믿는 고원준 이사와 함께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차장 직급이던 고원준 이사를 본부장으로 추천하면서 강제 방출을 했다.
얼떨결에 본부장이 되어버린 고원준 이사. 밸류체인에 의해서 프라임에셋 최초로 분할된 본부였지만 그는 아직 조직관리가 무엇인지, 본부 운영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다. 2006년 12월이다.
나는 나에게 미쳤다
대전에서 자그마한 보험대리점을 운영하던 강준희 사장.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보험대리점 소개서였는데 내용을 보지도 않고 출력을 눌렀지요. 그리고는 바로 외부에 나갔다 한참 뒤에 왔는데 그때까지도 계속 출력되고 있더군요.”
부사장이 만든 프라임에셋 회사소개서는 당시 보험대리점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을 직접 만나서 회사에 대한 소개를 받고 프라임에셋에 합류한 강준희 사장. 2년 뒤 그는 고원준 이사가 분할한 최초의 본부장이 되었다. 영업9본부장의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고원준 이사와 함께 성장하고 분할된 본부 숫자만 5개. 지금 현재도 두세 지사가 분할 직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회사에서 누구도 추월할 수 없는 ‘넘사벽’의 영역에 있다. 지극히 단순한 방식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고원준 이사였기에 달성할 수 있었다.
“일에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단아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회사에 목숨을 건 이단아. 하지만 전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팀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현재 영업4본부를 제외하고도 <프라임에셋>의 8개 영업본부를 직•간접적으로 배출하게 된 것이죠.”
AIG생명의 구조조정 대상이었던 FC가 <프라임에셋>에 입사 후, 7년 만에 연매출 500억원, 연간성장률 200%인 회사의 주역이 되어 자신의 삶과 함께 회사를 성장시키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키워 준 <프라임에셋>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능력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회사와 FC를 함께 성장시키는 <프라임에셋>의 조직 가이드이다. 조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초, 중, 고로 등급을 나누어 팀을 관리한다.
지극히 어려운 영업의 세계에서 팀을 관리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나누며 함께 성장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앞으로도 그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는 팀원들과 함께 조인업하는 것을 즐긴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팀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 학습하도록 하는 방법이 그의 조인업이다. 조인업을 통해 FC들이 성장하고 팀이 성장하도록 뒤에서 묵묵히 지원한다. 현재 고원준 이사를 통해 성장한 본부장 중에는 그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이도 있다.
은근히 질투 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되묻는다.
“혹시 아이가 있으세요? 아이가 저보다 더 공부를 잘한다거나 기자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면 질투하시겠습니까?”
그는 그들의 성공의 몫을 나눔의 즐거움과 열정에 대한 보답이라 말한다.
“저는 단지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가이드 할 뿐입니다. 그들이 성공한 것은 그 분들의 능력인 것이죠.”
누구나 영업본부장이라는 목표에 도전할 수 있도록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회사,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는 보상이 약속되는 <프라임에셋>에서 근무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고원준 이사.
그의 책상 위에 붙여진 「초심 2007」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도약을 꿈꾸는 그의 포부를 엿보게 해준다. 올해 회사에 대한 그의 목표는 장기 신계약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표는 지금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개인적인 꿈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전 <프라임에셋>을 지금보다 10배 이상 성장한 회사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음…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조용히 은퇴하고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흐훗”
2022년 현재
고원준 본부장은 9본부, 12본부, 19본부, 20본부, 31본부, 42본부, 45본부, 143본부, 209본부, 257본부 10개의 본부를 분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