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2년 10월 I 인터뷰 I 글 _ 홍보팀 김지영 기자 I 사진 _ 이금희 홍보팀장
‘춘천’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소양강, 자전거, 닭갈비, 막국수, MT, 겨울연가, 기차… 안개와 낭만 자욱한 도시에 또 하나의 숨은 명물이 있다. 토박이들은 다 아는 홍종원 본부장이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우연히 보험업계에 입문, 지역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고 미래설계에 동참하는 신뢰와 몰입의 영업으로 이름을 얻었다. 3년 전 <프라임에셋>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그는 다시금 두 팔 걷어붙이고 사람 농사에 매진하여 현재 153명의 FC와 동고동락한다. 돈을 쫓으며 살기보다는 더불어 잘 살기를 원하는, 괜찮은 꿈이 있는 본부장이다. 얼마 전 관할본부에 메가톤급 태풍이 지나가 아직은 힘겨운 날들을 보내는 그이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힘주어 세 가지를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문제는 해결된다.” “누구나 열심히 한다. 그래서 나는 미치도록 한다.” “춘천에서는 가능하다.”
2009년 9월 25일은 그의 <프라임에셋> 사번이 나온 날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3년 뒤인 2012년 9월 24일, 그는 본부장이 되어 신입FC들과 광장동 본사에 왔다. 이른 아침부터 춘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여 교육을 받은 10여 명 동료들과의 점심을 위해 기자와 일행은 한 식당에 자리했다. 한낮 가을햇살은 아직 따갑고 움직이면 덥다. 너도나도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그는 구석에 있는 선풍기 코드를 끼우고 바람의 각도를 이리저리 맞추어 놓는다. 행동은 연인처럼 섬세하고 풍채는 맏형처럼 든든하다.
“얼마나 기특한 친구들입니까. 저 입사할 당시에는 본부장이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 들어오는 친구들은 본부장 되겠다고 와 있으니… 우리 회사가 강원도 지역이 제일 약해요.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본부장을 만들 겁니다.”
전속사 3년 천하 “이건 아니다”
늘 그랬다. 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때는 6년 전. 사업이 ‘쫄딱 망해서’ 처가 일을 돕던 시절이 있었다. 인건비 대신 본인 부채의 이자와 원금을 대신 내주는 조건으로 육가공 업체에서 일했다. 수중에 돈이라고는 단돈 10원도 없었으니 “소득도 없고 희망도 없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 홍천에 배달을 나갔는데 뒤에서 차가 쿵 하고 박았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몸은 괜찮으니 차만 고쳐달라고 했다. 다음 날, 사고를 낸 사람이 차를 고쳐주러 육가공 회사에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아내도 알고 처형도 아는 처가 쪽 지인으로 교보생명 소장이었다. 그가 배달 일을 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전해들은 소장은 “보험도 사업이니까 열심히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며 이직을 권유했다. 말 그대로 ‘교통사고’같은 운명으로 보험업계에 입문한 것.
“교보생명에서 FC 6개월 만에 소장이 되었고 소장이 되고부터 일이 잘 풀렸어요. FC리쿠르팅도 굉장히 늘고. 그런데 한 3년 일하니까 조직은 성장했지만 점점 한계를 느껴요. 회사는 나에게 매출을 요구하지만 나 혼자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스트레스가 더 커졌어요. 언제부턴가 내가 부여받은 책임을 나누어서 그대로 직원들에게 전가하고 있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었어요.”
사표는 던졌으나 처리되지는 않았다. 전 직장을 그만두지 못한 상태에서 보험대리점을 알아봤다. 20군데 정도 다녀보던 중 당시 <프라임에셋>의 영업4본부 소속 팀장이던 이택일 이사를 만났다. 타 GA에서는 ‘얼마 주겠으니 와라’, ‘다 오픈해서 줄 테니 와라’ 등등 달콤한 유혹이 많았다. 그런데 <프라임에셋>은 단돈 1원도 내걸지 않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는가” 싶었는데 결국은 자신감으로 허리 곧게 편 그 뻣뻣한 회사를 택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회사의 브랜드 보다는 ‘이택일 팀장’의 열정에 더 마음이 갔었습니다. 서울에서 강원도 촌구석까지 찾아와주는 게 고마웠죠. 그 사람 하나 믿고 와서 같이 한 3년 미치도록 일한 거 같아요. 미치도록.”
꽃집·미용실 단골 FC를 잡아라
처음부터 ‘미치도록’ 모드는 아니었다. 2009년 9월에 입사해서 이듬해 2월까지, 그는 빈 사무실을 지켰다. 보험사무실인데도 FC가 한 명도 없는 그 막막한 세월을 살았다. 이유인즉슨, 전 직장에서 해촉을 안 해주고, 그의 리크루팅을 방해하기 위하여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가령 GA에 가면 급여도 없다더라. 돈 떼먹는다더라 등등 “GA는 다 그래”라는 뉘앙스로 홍 본부장의 리크루팅을 막았다. 이러한 행각은 누군가 그만두면 그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내부 단속을 강화하는 보험회사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관행의 희생자가 되어있었다.
“예전에는 일하다가 힘들어도 교보생명 간판만 보면 힘을 냈어요. 교보생명 상품이 다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특정 보험회사 상품이 모든 부문에서 다 좋을 수는 없잖아요. 다 좋으면 회사에서 엄청난 보험금이 지출되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죠.
<프라임에셋>에 와서 교보가 다 좋은 게 아니란 걸 알았죠. 연금은 삼성이 좋고, 어린이 보험은 신한이 좋고 등등, 각 보험사마다 주력상품이 다 달라요. 교보에 미쳤던 내 자신의 환상이 붕괴 되었어요. 신앙보다 투철한 믿음이었고, 교보가 내 절대적 정신의 지배자였거든요. 교보보다 더 좋은 상품이 타사에도 많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인정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는 예전에 자동차보험은 보험으로 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의무적으로 가입하는데 그게 무슨 보험인가 무시했단다. 그러다가 이 회사에 와서야 본인의 무지를 자각했다. 그렇게 교보라는 브랜드의 자부심이 무너지고 나자 교보에 몸 담았던 본인의 지난 3년도 싫어졌다. 교보측의 악의적인 훼방과 내적인 동력 상실로 인해서도 도무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 보내고 나니 상황은 참담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프라임에셋> 얘기를 했어요. 그 때 만나는 사람들은 나보다 <프라임에셋>을 더 잘 알아요. 얼마나 뻥을 치고 다녔는지(웃음). 입사 초기라 잘 알지도 못했을 텐데 아무튼 그 때부터 뛰어다녔어요. 가족, 친구, 지인 <프라임에셋>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를 테면 동네의 큰 꽃가게에 찾아간다. 꽃 배달을 자주 시키는 보험회사 FC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부탁한다. 감성마케팅을 하는 사람은 근조, 결혼식 등 화환을 많이 주문한다. 사실 영업 못하면 꽃 보낼 데도, 보낼 돈도 없기 마련이지 않은가. 대형 미용실도 주요 공략지다. 처형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삼성생명 건물 뒤에 있었다. 근처에 LIG, 신한생명 등 보험회사가 포진했다. 거기서 매일 머리를 만지는 FC는 적어도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남의 손에 머리 맡긴다는 것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처형을 통해 단골 FC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고 다녔다.
“경조사를 챙기고 외모를 관리하는 퀄리티 높은 FC를 중심으로 리쿠르팅 했고요. 남자 FC는 국내보험사 출신은 안 뽑았어요. 외국계 보험사만 뽑았어요. 국내 손생보사가 보험판매에 미쳐있을 때 외국계 보험회사는 고객의 생로병사에 따른 재무설계를 연구했죠.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하는지 배운 사람들이에요. 전속사처럼 보험 상품 한 개를 파는 게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고 크게 보는 분들을 만났죠. 저희 인증지사장 3분이 외국계 보험사 출신이에요. 리더가 될 사람들, 성장할 사람들을 뽑았고 지사장 되겠다는 사람들은 실제 다 됐어요.”
거미줄 인맥 ‘본토박이 영업’
홍 본부장의 59본부 열차에 동승한 사람은 현재 153명이다. <프라임에셋>에서는 본부장 평균수준이겠으나 그렇다고 결코 만만한 숫자는 아니다. “미치도록” 뛰어다닌 결과다. 그가 리쿠르팅에서 내세우는 <프라임에셋> 장점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수수료 경쟁력’이었다. 같은 일을 했을 때 “일단은 많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이 늘 돈만 갖고 일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에서 연봉 1~2억 받다가도 귀향해서 아버지 하던 떡볶이 집을 물려받기도 하지 않던가. 그런 생각에 이르자 너무 돈만 갖고 얘기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제는 안 그런다. ‘수수료 경쟁력’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을 판다.
“지금은 수수료만 좇으면 돈의 노예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보아야만 하죠. 회사가 성장할 때 내 포지션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의미입니다. 회사가 천명일 때도 FC, 2천명일 때도 FC면 그렇잖아요. FC에서 지사장, 본부장이 돼야죠. 지금은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회사가 성장할 때 내 포지션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보험영업에서 직급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계기가 있다. 이전 직장인 교보생명에서 “전국에서 제일 실적 많은 사람에게 주는 상”도 받았던 그다. 미쳐서 일하기도 했거니와 춘천이라서 가능했다고 한다. 한 지역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낸 홍 본부장은 지역사회의 거미줄 같은 인맥을 활용한 ‘촌놈스타일’ 마케팅을 펼쳤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합치니 “내 위로 20년 아래로 20년” 선후배가 있다고 한다. 춘천의 명동거리를 지나가면 입구에 있는 명보약국부터 나이키, 휠라 등등 좌우로 늘어선 상점 주인이 거의 다 아는 사람이라는 그.
“촌이 좋은 게, 제가 교보에 들어가서 랩, 고무장갑, 볼펜 같은 판촉물을 가득 담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시내를 계속 걸어 다녔어요. 키도 크지, 덩치 크지, 얼굴 새까맣지, 그런 사람이 매일 종이백 들고 돌아다녔더니 눈에 띈 모양이에요. 갈 데도 없고 차도 없어서 시내를 뱅글뱅글 돌아다닌 건데(웃음) 워낙 번화가이고 아는 사람 많으니까 소문이 난 거에요. 홍종원 무지 열심히 하더라.”
한 두 다리만 건너면 엮이는 인연의 물꼬를 타고 그의 이름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보험인으로서의 존재감은 급부상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다들 보험가입을 꺼렸다. 설계사 이직률이 워낙 높으니까 ‘너에게 가입해봤자 너도 곧 그만둘 거 아니냐’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고객은 보험회사에 1년 다니면 가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그는 1년을 다닌 후 그 고객을 가입시켰다. 그렇게 실적을 쌓아서 소장으로 진급하자 영업에 탄력이 붙었다. 원래 고객들은 FC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데 촌에서는 더 모른다고 너스레를 떠는 홍종원 본부장. 그가 소장이 된 후 춘천에서 제일 큰 삼성전자 매장에 가서 명함을 내밀었더니 대뜸 지인이 묻더란다. 너한테 얼마짜리 가입해야 되니?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설계사인데 상대방은 다르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말했죠. ‘형 소장은 100만원 이하는 계약 못해요.’ 결국에는 70만원 연금으로 가입했는데, 그 때 ‘설계사를 오래하기보다는 진급하는 게 더 낫다’라는 걸 알았죠.”
나는 무조건 닭이 먼저다
‘촌’에서 ‘소장’이 되고서 얻은 귀한 깨달음은 바로 이거다. 고객은 그가 어디 다니느냐 보다 무슨 직책인가를 더 중시한다는 점. 그리고 나의 직책이 높아질수록 고객의 믿음은 깊어갔다. “설계사가 아니니까 오래 다니겠지”라며 신뢰하는 것이다. 이는 얼핏 ‘직급’에 대한 믿음 같지만 실은 ‘홍종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직을 결정할 때, 고객의 우려대로 실망감을 안겨 줄까봐 천 번을 더 생각했다는 그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고액계약자 고객이 있었어요. 그 분만 이해해주면 흔쾌히 옮기고 아니면 안 가려고 했죠. 워낙 돈이 많아서 보험을 잘 알고 견문이 넓어서 외국의 선진보험시스템도 많이 아는 고객이었어요.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너가 하는 게 맞을 거다, 거기 가서도 잘 해라, 도와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머지 분들도 설득할 자신이 생겼어요. 아마 그 분이 옮기지 말라고 했으면 안 왔을 거예요. 그 분과 아직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이처럼 ‘촌놈스타일’ 영업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 먼저고 사람이 전부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돌아온다. 그 사람은 고객이기도 하고 동료이기도 하다. 홍 본부장은 상품 판매보다 리쿠르팅에 공을 들인다. 하루에 리쿠르팅 4~5번 뛰어다니면 뭘 얘기했는지 모를 정도로 녹초가 되지만 사람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보험회사는 새로운 인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돼요. 마치 댐과 같죠.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댐에 있는 물은 썩거나 증발해버려요. 새 사람 들어와야 해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난 무조건 닭이 먼저에요. 태초에 하느님이 닭을 만들었지 알을 만들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사람이 먼저고 계약은 그 다음이죠.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영업을 합니다. 또 소수정예보다 다수가 좋아요. 급격한 매출상승은 없어도 급격한 매출하락도 없거든요. 영업에는 홈런타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안타치는 놈이 많아야 해요.”
이쯤에서 홈런타자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예하지사에서 얼마 전 대형 먹튀사고가 났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알고 보니 전문 사기꾼이었다. 자신은 하던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회사를 옮기겠다면서 먼저 직원 서너 명을 리쿠르팅해서 영업가족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을 통해 거액의 계약을 넣어 놓고 3개월 후 입사하자마자 수당만 챙겨서 잠적해버린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이전 보험회사에서도 전적이 있던 요주의 인물이었고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는 등 치밀한 시나리오를 짜서 접근한 사실이 밝혀졌다. 예하지사에서는 의욕적으로 좋은 결과 만들어내려다가 속수무책 당한 꼴이 되었다. 특히 예하지사장은 조만간 본부장이 될 참이었는데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며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좋은 경험했는데 대가가 꽤 크네요.”
좌측부터 노준성 FC, 송지은 FC, 곽순옥 FC, 영업56본부 송기용 본부장, 김효진 FC, 영업59본부 홍종원 본부장, 김영중 FC,
이선희 지사장, 유대성 지사장, 김도연 FC, 이태규 FC
악재를 만나면 강해지는 ‘사람’
인생의 파고에 몸을 실어 몇 번이고 넘어본 홍 본부장은 경험적으로 안다. 비 온 다음에 땅이 굳는 자연의 섭리를. “악재를 만나면 사람이 강해진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엔 거짓이 없다. 오랜 뒤척임 끝에 얻어내었을 한 줌 사리 같은 말들이 계속 되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 거지요. 사람들은 나보고 어떻게 역경을 견디느냐 물어보지만 그냥 살다 보니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돼 있더라고요. 지금은 내 비애가 더 크게 느껴질 뿐인데, 본부장들 다 겪는 일이에요. 사장님이 이런 일을 안 겪었겠어요? 각자 자기 책임은 자기가 져야죠. 사장님은 자기 책임지고, 내 책임은 내가 지고. 사장님이 다른 사람 책임 대신 져주다가 회사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웃음). 어차피 해결할 사람은 자기 밖에 없어요.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해요.”
그는 도인이 아니다. “힘들지 않은 척은 안 할 게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매 순간 힘듦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대신 다른 일에 집중한다. 이번에 동부생명에서 전국 3위 하던 인재를 신입 FC로 영입했다. 악재 끝에 호재다. 그들이 와서 힘을 내고 있고, 장차 본부장에 도전한다고 하니까 도울 작정이다. 그의 얼굴에 어느새 하회탈 같은 웃음이 돈다. “될 때는 한 달 내내 놀아도 되고, 한 달에 한 시간도 못 자고 일해도 안 될 때는 안 돼요. 살다 보면 되는 게 있어요. 이것도 내 팔자야. 하하.”
아직 99% 시장 남았다
홍 본부장은 자다가도 깨서 벌떡 일어나 잠꼬대로 아내한테 리쿠르팅할 만큼 일에 미쳤던 시절을 기억한다. 살아보니 그게 그렇다더라. 보험영업 잘하는 사람은 차도 잘 팔고 화장품도 잘 팔지만 한 가지 못하는 사람은 다 못한다. 영업은 기술이 아니라 일 자체를 즐기면서 일에 대한 집중력이 미치도록 있어야 잘 할 수 있음을 그는 삶으로 증명하고 있다.
“일이 정해지면 몰입해야 하죠. 성공한 사람 만나면 ‘열심히 했어요. 운이 좋아요’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겸손이에요. 이 세상에 열심히 해서 성공한 사람은 없어요. 성공한 사람은 미치듯이 한 거죠. 전국 설계사가 40만~70만이라고 해요. 우리 회사 설계사가 7천명이면 1%죠. 아직 99% 시장 남았어요. 아마 설계사가 7만 명이면 때려치웠을 거야(웃음). 지금 들어온 사람은 고점에 갈 수 있어요. 아직은 기회가 있어요.”
어느 시인은 말했다. ‘비를 안 맞으려면 간단하다. 오두막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비를 안 오게 할 수는 없다’고. 신입FC들과 오순도순 식사를 하는 그에게서 오두막에서 비를 피하는 모습이 스친다. 태양은 다시 뜰 것이고, 그는 신발 끈을 묶을 것이다. 두 팔 걷어붙일 것이다. 허허허 웃으며 사람 사이를 누빌 것이다. “어려운 친구 있으면 올려주고 잘 나가는 선배한테는 배우고, 가늘고 길게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홍종원의 스타일이다. 촌놈 스타일!
2022년 현재
홍종원 본부장은 108본부, 127본부, 163본부, 3개의 본부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