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2년 8월 I 인터뷰 I 글 _ 홍보팀 이용지 기자 I 사진 _ 이금희 홍보팀장
<프라임에셋> 영업9본부의 강준희 본부장은 대전사업단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누구보다 보험에만 몰두하며 <프라임에셋>의 성장을 견인한 강준희 본부장. 하지만 지금 그는 앞만 보고 달려나가던 과거를 뒤로하고 취미 생활에 푹 빠져있다. 남성미 넘치는 강준희 본부장이 선택한 취미 생활은 섬세하고 감성적인 나무공예. 넘치는 추진력에 마음의 여유를 더한 그의 리더십은 더욱 끈끈하고 따뜻해졌다.
<프라임에셋>은 규정집을 가치의 최우선에 둔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을 서로 간의 약속을 통해 중재하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스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임에셋>은 이러한 이상적인 시스템 하에서 GA 업계 초유의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으며,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성공이기에 조직의 성장은 빠르고 안정적이다.
영업 9본부의 강준희 본부장이 <프라임에셋>과 인연을 맺은 때가 2007년이다.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배출된 첫 번째 본부장인 그는 <프라임에셋>이 고속 성장을 시작한 이후의 역사를 함께해 왔다. 대전에 사업단이 만들어지는 데 공을 세우며 회사가 전국으로 뻗어나가는데 힘이 되어 준 강준희 본부장. 그 역시 <프라임에셋>이 가지고 있는 규정과 시스템이 얼마나 이상적인가에 대해 엄지를 치켜세운다.
“<프라임에셋>은 젊고 똑똑한 조직입니다. 투자와 세무에 대한 지식은 물론, IT에 대한 감각까지 갖추고 있는 젊고 능력 있는 인원들이 이상적인 시스템에 녹아들며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구성원들이 젊기에 이 시대가 원하는 영업 방식과 조직 문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상적인 <프라임에셋>의 프레임 안에서 ‘정(情)’이라는 고전적인 가치를 퍼트리려 하고 있다. ‘정’에 의존한 영업, ‘정’에 의존한 조직 관리가 구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옮긴 이 시기에 다시금 ‘정’을 언급한 저의는 무엇일까?
“시스템이 완벽한 조직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 구성원 간에 ‘정’이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결속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정’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천여 명의 FC를 거느린 <프라임에셋>의 거대 조직이 ‘정’을 통해 유기적인 결속력을 갖는다면 더 큰 도약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아서 말이죠.”
엄격한 약속을 기반으로 하는 규정집, 너그러움이 통용되는 ‘정’의 논리… 두 가치는 어느 선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너그럽고 친근한 관리자로 거듭나고 있는 강준희 본부장의 이야기 속에서 상충하는 두 가치의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수몰지구 출신 전자공학도
1967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난 강준희 본부장. 전원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그는 대청댐 공사로 인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타의에 의해 도시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정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다시 찾을 수 없는 고향이 더 그리운 것 같아요. 실향민들은 통일이라도 기다려 보겠지만, 물에 잠겨버린 고향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여전히 아쉽습니다.”
물에 잠긴 고향에서도, 도시로 자리를 옮겨서도 그는 세상을 알아가고 즐기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과 함께 농악대에서 생활하며 전국 대회에서 입상했고, 수영 선수로 활동하며 건강하고 활기차게 젊음을 누렸다. 물건을 만드는데도 재주를 발휘하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직접 만들었고, 한식, 양식, 중식 요리 자격증을 포함 스무 개에 달하는 자격증을 따며 끊임없이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어릴 때는 참 좋아한 것도 많고 깊게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20대에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발명품들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매형이 운영하는 전자 회사에 취직한 강준희 본부장은 특히 공중전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발명품 덕분에 불편함을 겪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뭘 개발했냐면요. 공중전화 카드를 넣으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카드 강제 배출기를 개발했고요, DDD 공중전화의 돈을 훔쳐 가는 걸 막아주는 경보 센서를 개발해서 도둑도 많이 잡았죠. 공중전화에 돈이 걸려 있는데 돈을 또 넣지 않도록 수화기를 들면 고장 표시가 뜨도록 하는 장치도 개발했습니다. 공중전화하고는 제가 인연이 참 많습니다.”
실패와 도피의 시간
전자와 전파에 대한 실무 능력이 탁월했던 강준희 본부장은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고연봉의 엔지니어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큰 문제는 항상 잘 나갈 때 발생한다.
“제가 직접 회사를 차리고 싶었어요. 당시에 전화기로 집안의 시스템을 제어하는 ‘홈오토메이션’ 상품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회사를 차리고 상품이 막 출시를 앞둔 때에 삼성에서 같은 기능의 상품이 출시되더군요. 바로 회사를 접었죠.”
회사의 문을 닫게 된 강준희 본부장은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렸다. 음식점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큰 사업을 해보겠다 결심하고 가진 모든 것 그 이상을 쏟아부었다.
“어머님의 붕어 찜과 매운탕은 맛이 최고였어요. 제가 벌어둔 돈을 모두 투자하고, 아버님의 모든 재산은 물론, 은행에서 가능한 최대의 금액을 대출받아서 으리으리한 가든을 차렸는데, IMF가 찾아왔어요.”
가진 모든 재산을 잃은 것은 물론 부모님의 돈도 함께 날려버린 강준희 본부장. 거기에 은행에 갚아야 할 채무가 무려 7억 원이었다.
“큰 실패를 겪고 나니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집을 나와 충북 제천으로 야반도주를 합니다.”
그때 강준희 본부장은 혼자 몸이 아니었다.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와 자식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의 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일어서야 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자동차 딜러였습니다. 딜러 생활을 하면서 자동차 보험도 함께 팔았는데 간절함 때문인지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은행에서도 빚을 절반으로 감면해 줘서 3억 5천만 원을 다 갚고 대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놀랍게도 그가 3억 5천만 원의 큰돈을 다 갚는 데는 1년 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집사람이 너무 현명한 사람이에요. 돈을 아무리 잘 벌어도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빚을 줄여 나갔고, 본인도 열심히 일하면서 빚을 갚아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해줬어요. 젊었을 때 노동은 신성한 거라며 옆에서 힘이 되어준 집사람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빚을 모두 갚고 다시 신용카드를 만들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는 강준희 본부장. 그렇게 그의 인생에는 다시금 빛이 찾아들었다.
좌측부터 9본부 임은영 총무, 강준희 본부장, 박미애 팀장
보험을 통한 새 출발
대전으로 컴백한 강준희 본부장은 본격적으로 보험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자동차 딜러를 하면서 자동차 보험 판매에 대한 노하우가 확실했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전에서 법인을 하던 친구가 있어서 그 밑에서 업무를 배운 뒤에 법인을 차렸어요. 메리츠화재를 노크해서 지원을 받았고, 지원에 합당한 매출을 올려줬습니다. 항상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으니 원수사에서의 대우도 좋았고, 수입도 훌륭했습니다.”
원수사에서 받는 장기 수수료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기, 강준희 본부장은 매월 통장에 입금되는 금액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설계사들에게 장기 수수료의 100%를 지급하던 시기였어요. 지금 700% 정도까지 수수료가 올라갔으니 법인 대표의 통장에 얼마가 찍혔겠어요.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인 거죠.”
영업 실적도 좋았고, 법인 대표로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엄청났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인생의 급 반전. 그렇게 강준희 본부장은 점점 보험 하나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대전사업단, <프라임에셋>과의 인연
법인 대표로 승승장구하던 강준희 본부장. 하지만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장기 수수료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설계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수수료가 계속해서 상승했고, 작은 법인을 운영하면서 환경의 변화를 모두 맞춰나가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렇게 대형 GA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강준희 본부장.
“2006년의 어느 날, 이름조차 알지도 못했던 <프라임인스넷>이라는 GA의 고원준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메일을 한 통 보냈어요. 회사소개서였는데 출력을 눌러 놓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니 아까운 컬러 잉크로 출력이 된 거예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죠. 내용을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죠. 거기에는 법인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한계 상황과 그 해법이 모두 담겨 있었거든요. 그렇게 영업4본부의 고원준 이사와 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준희 본부장은 <프라임에셋>의 경영 철학이 자신이 평소 생각해왔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프라임에셋> 영업4본부 소속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전에 사업단을 유치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당시에는 회사의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단을 만든다는 건 모험이었죠. 6개월 안에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회사가 위태로울 수도 있었거든요.”
텅 비어 있었던 대전 사업단. 하지만 계속된 사업 설명회를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프라임에셋>이 가진 장점들을 알려 나갔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뒤 대전 사업단은 안정적인 인원을 확보했고, <프라임에셋>은 전국 망 확대의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대전은 한국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잖아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남부의 각 지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죠. 대전 사업단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사업단이 두 개 층으로 확대되었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많은 산하 본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대전사업단이 <프라임에셋>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거죠.”
2008년 1월 영업 9본부장이 된 강준희 본부장 역시 전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프라임에셋>과 함께 하면서 아주 잘 됐어요. 너무 많은 돈이 들어오니까 욕심이 나더군요. 투자에 대한 욕구가 생기면서 서울, 청주, 전주에 사무실을 만들었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리쿠르팅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착이었다. 직접 가서 관리를 하지 않는 조직은 무너지기 일쑤였고, 투자한 임차료, 집기, 통신 설비 등은 모두 리스크로 돌아왔다.
“꽤 많은 돈을 까먹었지요. 게다가 불행은 함께 온다고 2009년도에 본부장 자격기준이 환산 5억 원에서 3억 원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 손보업계 사상 최대의 업적이 들어오던 때가 있었거든요. 아직 본부로서 독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지사 둘이 얼떨결에 본부가 되었어요.”
지금이야 변액 자격, 인원수, 실질적인 모집 체력 등등 여러 가지를 까다롭게 심사하지만 당시만 해도 환산 업적만 달성하면 누구나 본부장으로 승급이 가능하던 시기였다. 본부로 독립한 두 지사는 본부 체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관리수당, 분할수당, 직책수당 등을 확보하지 못한 강준희 본부장의 재무구조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수입이 급감하면서 강준희 본부장은 회사의 밸류체인 시스템에 대한 큰 고민과 회의를 경험하게 되는데…
침체기 그리고 공황장애
무한 성장할 것 같던 대전사업단은 그렇게 점점 성장의 속도가 줄어갔다. 영업 실적이 모자라 지사로 강등되는 본부들이 속출했고, 사업단 외부에 독립 사무실을 만드는 본부까지 생기면서 결국 대전사업단은 다시 한 개 층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대전에서 본부장 세 명이 강등 당했어요. 불행히도 모두 다 제 소속이었지요. 결국 그런 부분이 저를 비롯하여 대전사업단에도 정체된 시간을 만들었지만, 과도기적인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전사업단이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과거의 보험 습관을 빨리 버리지 못했고, <프라임에셋>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쳤던 거죠.”
스스로를 전형적인 A형이라고 평하는 강준희 본부장. 어려움들이 찾아오면서 많은 고민에 시달렸고, 급기야 공황장애 증상까지 그를 찾아왔다.
“사람이 싫어지더라고요. 쟤가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 것 같고, ‘나를 보고 왜 웃지?’ 이러면서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어지럼증까지 찾아오면서 결국 의사 친구를 찾았어요.”
강준희 본부장의 의사 친구는 치료에 앞서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열 가지를 적어봐.’라는 의사의 질문에 강준희 본부장은 멍해졌다. 단 한 개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내가 보험 말고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랬더니 친구가 다시 물어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적어보라고요.”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렇게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삶을 즐겼던 강준희 본부장은 20여 년 동안 삶에 치이며 여유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변화에 대한 필요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어릴 때 조각을 잘했어요. 비누 깎고 나무 깎고 팽이도 잘 만들었던 기억이 나서 나무 공예를 시작했어요. 집에 공방을 만들고 무언가를 만드는데, 그거 할 때는 잡생각이 없어요. 어지러웠던 증상도 싹 없어졌고요. 너무 행복하고, 스스로 그 병을 만들어 나갔는데, 그걸 내 스스로 다시 이겨냈다는 게 또 하나의 큰 행복입니다.”
情을 가득 담은 형님 리더십
마음의 여유를 찾은 강준희 본부장은 보험에만 쏟던 시간을 나무공예에 나누어 주면서 오히려 보험 일에 더 큰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젊은 FC들과 만나면 하이파이브로 인사하고, 어깨도 주물러 주면서 정을 나누려고 노력합니다. 잠깐 시간이 날 때면 후배들을 데리고 샌드위치 하나씩 먹으면서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나누어요. 그리고 그 시간들을 통해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게 되고, 그들을 통해 젊은 감각을 배우기도 합니다.”
성공가도에서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던 강준희 본부장.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마음의 여유를 찾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형님처럼 조직을 보듬어 나가는 그에게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과도기의 시행착오를 먼저 체험하면서 힘든 시기를 넘겨야 했지만, 이제는 본부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전 지역은 여전히 <프라임에셋>의 시스템 안에서 큰 장점을 갖고 있는 곳이에요. <프라임에셋>의 완벽한 시스템 아래에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정이 공존할 수 있다면 다시금 전성기가 찾아올 것이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