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8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_ 홍보팀
삼성의 인재중심 엘리트 문화, 현대의 모험적이고 저돌적인 문화, 3M의 창의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 그리고 밸류체인을 통한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중시하는 <프라임에셋>등 각각의 회사마다 독특한 기업 문화가 있다. 10여 년 이상 본인의 몸에 배인 조직의 문화를 한 순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삼성화재>에서 11년여를 근무해오던 강영만. 그는 4년 전 시스템과 영업망이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프라임에셋>으로 과감한 이직을 단행하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를 전북 익산의 영업12본부에서 만났다.
기자에게 전라북도 익산은 낯선 땅이다. 그저 알고 있는 지식이라곤 미륵사터를 비롯한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정도다. 인터뷰 일정을 잡으며 촬영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익산시에서 약 30분 안쪽의 거리에 있는 허균의 유배지 함라마을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강영만 본부장에 대한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익산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찾아 간 영업12본부는 무척 깨끗하고 깔끔했다. 들어서자마자 동양적이면서도 약간 이국적인 여성분이 친절한 미소로 기자를 안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강영만 본부장의 부인이었다. 바쁜 일정에 쫓기다 보니 안 살림이든 바깥 살림이든 모두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그. 약간 부끄러워하는 말투였지만 아내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속에서 아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난과 부지런함이 나를 성장 시켰다.
86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장안동 안경점에서 생활하며 숙식만 제공받고 2년 여 동안 일을 했다. 그러던 88년도에 입영통지서를 받고 입대하였다. 그가 입대한 후, 우리나라에는 안경기술사 자격증제도가 생겼고 어느 정도 안경업에 종사한 경력자에게는 시험 없이 통과할 수 있는 한시적 특혜가 주어졌다. 하지만 군인이었던 그에게는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안경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제대 후 그는 안경업에 종사하지 않고 고향 익산으로 내려와 DM 발송 업체를 설립한다. 1992년도의 일이다. 한 업체당 업무대행비 1만5천 원을 받으며 그곳에서 보내는 DM을 대신 발송해 주는 것. 군산을 비롯하여 충남 대천까지 고객이 부르면 언제든 찾아갔다. 지금은 도로 정비가 잘 되어 가까운 거리가 되었지만, 그때만해도 군산이나 대천까지 가려면 험한 길을 몇 번이나 돌아가야 했다. 눈이 오면 되돌아오기를 수 십 번. 열심히 했지만 5명의 직원이 기록한 첫 달 매출은 10만 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지만, 시작하자마자 포기할 수는 없었다. DM사업의 승패는 결국 박리다매였고, 매출을 늘리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직원 수도 늘려가게 된다.
DM사업은 수익구조가 정해져 있다. 때문에 직원 수를 늘려 매출을 증가시켜도 영업이익이 함께 증가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사무실 임차료와 인건비라도 맞출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사업을 시작한지 2년 후부터 아주 조금씩 영업이익이 났지만 그래도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아니었다. DM발송 이외의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DM발송 업무 대부분이 오전과 저녁 시간 대에 집중되었기에 낮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삭제) 안경점에서도 일을 해봤고, 작지만 DM회사도 운영하고 있으니 영업은 자신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게 바로 보험영업이었다.
삼성화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처음엔 그저 여유로운 낮 시간대의 일거리 정도로 시작한 보험영업이었지만 점차 보험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일을 함께 병행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자기 사업이었던 DM사업을 어정쩡한 상태로 두고 보험영업에만 치중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비전 없는 DM사업에만 올인하기도 현실적으론 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보험영업을 잘 할수록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4년여 동안 한 어깨에 두 개의 짐을 짊어졌던 강영만 본부장은 결국 하나를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바로 보험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것. 그래도 DM사업은 본인의 회사였으니 애착이 있었고, 어떻게든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담당 소장에게 그러한 뜻을 내비치자 당시 삼성화재 소장은 근면 성실한 그를 잡기 위하여 뜻밖의 제안을 한다. 영업소의 설계사들 중 전산을 가장 능숙하게 다루며, 성실하게 영업을 했던 그에게 육성팀장의 자리를 제안했던 것. 소장은 그에게 ‘육성팀장이 되면 월 110만 원 정도 지원을 받게 되니 DM사업보다는 보험영업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그에게 보험에 전념하기를 권유했다. 강영만 본부장 입장에서는 월 110만원의 별도 수당을 받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로를 수정하여 보험영업에 전념하게 된다.
고객은 나의 가족이다.
1999년 그는 삼성화재 육성팀장으로 선발되어 보험에 전념하는 인생을 시작한다. 이듬해 영업팀장의 위치에 오르면서 그의 보험경력은 점차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2001년 대표이사 CONFERENCE 2W 연속 수상, 2002년 지점 우수사원 CONFERENCE 수상, DRC(Digital Risk Consultant) 팀장, SRC(Samsung Risk Consultant) 팀장 등. 늦은 시작을 만회하려는 듯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뛰어다녔다. 당시 스스로의 모습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새벽 2시 반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고객의 전화가 왔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다는 거였어요. 저를 통하여 보험에 가입한 고객 분들은 저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고 망설임 없이 달려갔습니다”
밤 늦은 시각 택시를 타고 나타난 보험 영업사원에게 고객은 감동했고, 지금까지도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최상급 고객이 되었다고 한다. 고객이 사고가 나면 언제, 어느 곳이든지 직접 달려가는 그의 프로정신에 감동받은 고객들은 이후로도 사고가 나면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고객이 한 분 있다.
“당시 75세였던 그 고객님은 연세도 많으셨지만 차량 고장도 잦았던 분이었죠. 그런데 차가 고장나면 그 자리에서 제가 나타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질 않으시는 거예요. 때문에 그 고객 분에게 전화가 오면 언제 어디든 빨리 달려가야 했어요. 그날도 큰 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게 되었고, 뒤로는 차들이 한참 밀렸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하셨던 거죠. 경찰이 와도 소용없었어요. 뒤 늦게 제가 나타나자 조용히 키를 건네주셨죠. 저는 고객님의 차를 보험처리 한 후 수리를 맡기고, 수리가 끝나면 항상 고객님 댁으로 차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 고객은 보험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강영만 본부장과 의논했고, 사고가 나면 그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분이지만 강영만 본부장에게는 고객에 대한 최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셨던 소중한 분이다. 그 고객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절대적 신임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말하는 강영만 본부장. 이후 고객에 대한 절대적 가치 서비스는 강영만 본부장의 일상이 되었고, 지금도 그의 고객 대부분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고정 고객이다.
새로운 도전, 그리고 <프라임에셋>
삼성화재에서 10여 년 이상의 영업활동을 그는 충실히 해냈다. 그 동안 삼성화재 대표이사가 주는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2002년 DRC팀장과 2005년 SRC팀장도 역임했다. 그런데 경력이 늘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쌓여갔다. 그는 스스로의 미래가 점점 두려워졌다. 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이 그냥 현실에 안주할 것 같았고, 대부분의 FC가 그렇듯 삼성화재 소속 FC라는 명함 이외에는 스스로의 삶에서 더 이상의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것을 위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보험영업은 삼성화재에서 배울 만큼 배웠고, 영업조직을 운영하는 방법 또한 SRC 전문학습 양성팀장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공부할 수 있었다. 이제는 FC나 팀장으로서가 아닌, 관리자로서의 자신을 준비하고 싶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GA였다.
2006년도에 삼성화재를 그만 둔 그는 GA에 대한 철저한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각 GA의 설립연도와 수수료 테이블, 판매회사의 수와 조직 성향 등 취합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 GA를 설립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앞선 GA의 시스템을 배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신중하게 여러 GA를 알아보던 2007년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메일을 받게 된다. 바로 <프라임에셋> 영업4본부장 고원준 이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당시 고원준 이사는 조직 증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 개척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전화번호부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파악한 보험대리점에 우편이나 이메일 등으로 회사소개서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원준 이사와 인연이 닿게 된 강영만 본부장은 스스로가 <프라임에셋>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며 고원준 이사를 통하여 궁금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고원준 이사는 대전사업단의 영업개척을 위하여 대전에 상주하다시피 했었고, 한 시간 거리인 익산을 수도 없이 오갔다고 한다. 그리고 2007년 봄, <프라임에셋> 영업4본부의 익산지사가 출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동료들을 규합하여 팀장으로 출발하였다. 이윽고 3개월 만에 정식으로 지사를 설립하였고 6개월이 지나자 <프라임에셋> 전체 지사 평균업적의 2배를 달성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영업가족 교육을 위하여 자주 사용했던 방법은 삼성화재 SRC 과정에서 배웠던 자체학습 운영시스템이었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상품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는데, 매일 개최되었기 때문에 상품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영업가족의 단합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단합된 영업가족의 힘이었을까? 처음의 사무실은 더 이상 자리가 부족하여 새로운 증원이 불가능해 졌다. 결국 2008년 초에 고원준 이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하여 약 100여 평에 이르는 새로운 사무실을 만들게 되었고, 그는 곧바로 시니어 지사장으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년간 그는 본부 승격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매월 <프라임에셋> 전체 지사 중 신기록 업적을 달성하며 성장을 하지만, 그 와중에 타 GA로 이직하는 동료들을 비롯하여 ‘먹튀 FC’에 의한 엄청난 환수도 경험하였다. 모든 것을 다 본인의 부덕으로 돌리며,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은 현재의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강영만 본부장. 결국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2008년 12월부로 익산지사는 영업4본부에서 분할되어 영업12본부로 승격하게 되었다. 본부로 승격되면서 지금은 없어진 제도인 시스템 지원금을 회사로부터 지급받아 고원준 이사의 사무실 지원금을 상환하였고, 지사 육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결국 2009년 가을에는 영업26본부(이철우 본부장)를 분할시키고, 2010년 여름에는 영업34본부(소성혁 본부장)를 분할시킬 수 있었다.
<프라임에셋>에서 성장과 분할은 동의어
<프라임에셋>의 시스템은 정말 재미있다.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분할을 해야만 한다. 보험업계에서 조직이 성장을 한다는 것은 내 밑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회사는 정 반대다.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분리해야만 한다. 때문에 다른 GA들처럼 내부 갈등에 의해서 조직이 조각나거나 법인 전체가 휘청거릴 이유가 없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분할을 경험한 영업본부장은 더 많은 본부를 분할한다는 점이다. 얼핏 생각하면 분할을 하면 수익이 감소할 것 같지만, 이 회사의 보상 시스템은 오히려 조직이 모여 있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는 줄여주고, 분리를 통한 성장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강영만 본부장은 팀장으로 시작한지 2년이 안돼서 본부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업12본부의 소속 지사 2곳을 일 년에 한 곳씩 새로운 영업본부로 분할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프라임에셋> 전체 본부장의 30%는 혈혈단신 FC로 입사하여 본부장으로 승격된 사람이고, 50%는 강영만 본부장처럼 팀장규모로 시작하여 본부장이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전속으로 있었다면 여전히 팀장으로 있었을 그가 <프라임에셋>을 통하여 최고 영업관리자가 되었고, 자신과 같은 최고관리자를 둘 이나 더 배출한 것이다. 분할을 통하여 소득이 줄었다면 <프라임에셋>의 본부장 수가 더 이상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본부장의 수가 꾸준히 증가할 뿐만 아니라, 전체 영업가족의 수도 증가(7월 현재 3,600명)하는 것을 보면 열정과 <밸류체인> 시스템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듯하다. 보면 볼수록 오묘한 이 <밸류체인>이라는 시스템 하에서 강영만 본부장은 이미 2개의 영업본부를 분할하고도 지속적으로 높은 소득을 창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영업본부로 서로 분리되었지만 아직도 그들이 자기 식구들 같다고 말하는 강영만 본부장. 그에게서 <프라임에셋> 특유의 진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영업현장에서 조직을 성장하도록 육성하고 분할 시키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는 항상 긴장하며 예전보다 더욱 노력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제 전라북도 익산을 넘어 전국을 자신의 영업장소로 생각한다. 이미 경남 울산에도 영업12본부의 지사가 설립되어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고, 향후에도 경상도 지역을 적극적인 개척지로 생각한다는 강영만 본부장.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는 오히려 좀 더 빨리 합류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며 욕심을 부린다.
“지금도 그렇지만 GA 중에 <프라임에셋>같은 회사는 유일무이합니다. 우리 회사의 시스템을 많이들 흉내 내려고 하지만 따라 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요. 저희 영업12본부에도 다른 GA에서 내세우는 더 좋은 조건을 따라갔다가 실망만 하고 되돌아 온 분이 여럿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신의와 신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프라임에셋>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제 믿음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강영만 본부장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사를 업그레이드 시키며 구성원들까지 함께 성장시키는 <프라임에셋>에 늘 감동받는다’고 말한다. <프라임에셋>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어떤 GA의 팀장이나 지사장쯤 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당당하게 내비치는 그. 항상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하는 강영만 본부장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구성원과 함께 공동의 성장을 추구하는 <프라임에셋>의 무서운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22년 현재
강영만 본부장은 34본부, 38본부, 58본부, 70본부 4개의 본부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