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10년 7월 I 인터뷰 I 글 · 사진 <프라임에셋>홍보팀
사람에 대한 신뢰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단지 비즈니스를 통한 인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본인의 회사를 위하여, 그리고 그 회사의 리더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깊은 신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기자는 <프라임에셋>의 영업3본부장 허연희 이사를 통하여 이제까지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소중했던 ‘신뢰의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사실 저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프라임에셋>에 너무 많은데 왜 나 같은 평범한 아줌마를 인터뷰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정말 할 말이 없는데…”
허연희 이사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하였다. 본인을 할 바에는 회사의 젊은 지사장들이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먼저 해야 된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그녀. 결국 본인의 인터뷰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을 시, 향후 영업3본부의 가족들은 사보의 모든 내용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영진의 강력한 협박(?)이 있고 나서야 그녀는 기자와의 인터뷰에 겨우 응해주었다. 다른 회사 같으면 인터뷰 먼저 하겠다고 서로 난리일 텐데, 이 회사는 참….
일과 가정, 지혜를 동반한 삶의 컨트롤
“저에게 <프라임에셋>은 제 삶의 동반자라고나 해야 하나, 전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곳에 와서 노처녀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좋은 일이 참 많았답니다”
그녀의 첫 화두는 행복하고 겸손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프라임에셋>의 영업이사로서 3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업무들을 매일 균형 있게 분산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 기자는 그녀 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21세기. 시대가 변했지만 직장 여성이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소화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일과 가정을 균형 있게 이끌어가며 <프라임에셋> 영업이사의 위치에 까지 오른 그녀 만의 비법은 무엇일까?
그녀는 회사와 꼬박 7년을 함께하며 45세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일과 가정을 모두 손에 쥐었다. 그녀 혼자로서는 벅차 보이는 일들이 이토록 행복해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이고, 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프라임에셋>의 큰 성과가 아닌가 싶다.
그녀의 바쁜 일상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6살과 2살배기 아이를 둔 엄마로서 저녁 7시부터 오전 9시까지는 온전히 가정에 충실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영업3본부 200여 명의 FC들을 이끄는 리더로 살아간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 집을 가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집에 돌아가서 두 아이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지요.”
그녀에게 가정의 행복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이다. 그녀에게는 남편의 따뜻한 배려와 든든한 외조가 있었고 이제는 두 자녀까지 있기에, 뒤늦은 결혼으로 얻은 가족의 존재는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일과 가정을 모두 지켜내는 것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제가 어린 아이의 엄마여서 영업가족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만큼 술도 함께 마셔주고 늦은 시간까지 그들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삶의 애환을 나누고 싶은데 두 자녀의 엄마인 저에겐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일하는 워킹맘이 모두 그렇듯 그녀에게 저녁 시간대의 회식자리는 매우 어려운 일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영업가족들과 회식을 한다. 함께 점심식사를 나누며, 그들의 어려움을 공유하고자 노력한다. 그 어떤 사업과 견주어도 치열한 보험업계에서, <프라임에셋>의 영업이사라는 직책과 함께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그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수많은 이들을 이끌며 현명하게 두 마리 토끼를 손에 쥔 행복한 여자임이 틀림없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었다
<프라임에셋>이 설립된 서울 성수동의 오피스텔에는 책상이 두 개 있었다. 이윤 대표는 하루 종일 외부 대리점들을 돌아다니며 실적을 모으는 대리점 영업을 하였고, 정지연 실장(2010년 7월 현 업무지원실장)과 송강임 실장(2010년 7월 현 재경관리실장)은 전화와 팩스로 들어온 업무를 처리했다. 정지연 실장은 창간호 인터뷰에서 회사는 설립 초창기인 2002년 말부터 2004년 초까지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하였다. 이윤 대표는 당시 자동차보험대리점의 관행이었던 실적 모집을 좀 더 안정적으로 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였고, 한 사무실에서 대리점들이 함께 근무하며 회사가 일정 마진을 취하면 경영 상태가 좀 더 나아지리라 판단하였다.
2003년 가을, 우여곡절 끝에 회사는 보험사의 임차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현재 본사가 위치한 광장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메리츠화재에서 영업소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허연희 이사가 회사에 합류한 시점은 그 즈음이다. 당시의 광장동 사무실은 한 층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회사는 이 중 두 구역을 메리츠화재와 삼성화재를 통하여 임차하였다. 그리고 허연희 이사는 이 중 한 구역을 맡아 TM 영업실을 시작하였다.
회사는 당시 대리점영업과 TM영업을 사업의 두 축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 TM실장이던 허연희 이사는 일정 급여를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직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업의 한 축을 총괄하는 사업 파트너였다.
광장동으로의 사무실 이전 후에도 대리점 모집은 쉽게 되지 않았다. 대리점을 위해서 임차한 구역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그나마 허연희 이사가 총괄하는 TM실에 몇 몇의 TM사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TM영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DB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회사는 돈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제대로 된 DB가 없었고, 수익 창출이 힘든 DB는 결국 TM사원들의 이직률만 심화시켰다. 한번은 TM사원들에게 기본급까지 제공하며 영업을 독려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리고 결국 보험사로부터 임차회수 통지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2004년 초, 허연희 이사는 이윤 대표에게 ‘지난 몇 달간 TM실장으로써 받았던 급여와 보험사의 임차지원 환수금을 모두 본인이 부담할 테니, 비어있는 사무실은 보험사에 반납하고 사무실을 한 구역으로 축소하여 운영하자’고 간곡하게 조언했다. 그러나 이윤 대표는 ‘곧 대리점들이 합류할 테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기어이 그녀에게 급여까지 지급했다. 단지 직원이었다면 회사 경영상태와 상관 없이 급여만 받았을 것이고, 흔하디 흔한 사업 파트너였다면 손실을 최소화하고 떠났을 것이다. 이윤 대표와 회사에 대한 허연희 이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에는 미래가 안보였어요. 한 달에도 수 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GA업계에서 신생 GA를 믿고 따라와 줄 조직은 아무도 없었죠.”
TM사원을 채용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합류할 대리점과 FC를 증원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곧 도산할지도 모르는 대리점에 누가 함께 하겠는가! 계절로만 겨울이 아니었다. 2004년 1월의 그들은 길고도 추운 겨울을 가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던가! 2004년 1월의 도산 위기는 경영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겨우 넘길 수 있었고, 이후 몇 달 동안 회사는 기적적으로 생존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4월부터 <프라임에셋>의 비상(飛上)이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FC들을 보며 정말 가슴이 벅차 오르더군요.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답니다.”
허연희 이사는 더 이상 사무실 안에만 상주하는 TM실장이 아니었다. TM실은 영업3본부라는 조직구조로 변경되었고, 이윤 대표와 마찬가지로 수 많은 자동차보험 대리점들을 다니며 실적을 모으는 영업본부장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업3본부의 자동차보험 실적은 회사 전체에서 한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를 하고 매주 전국을 순회했다. 회사 안에서는 전략을 새우고 회사 밖을 나가면 영업을 했다. 텅텅 비어있던 사무실은 점차 FC들로 북적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사무실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프라임에셋>은 짧은 시간에 중견 손보 GA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고난을 넘은 우정과 신뢰, 그리고 성공의 시작
GA업계 특성 중의 하나는 사람들의 이합집산이 너무 빈번하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1등을 달리던 GA가 하루아침에 세 조각, 네 조각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보험사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수십억 원의 자본금으로 화려하게 출범한 GA가 두 분기도 못 가서 간판을 내리기도 한다. 단지 돈과 시스템, 그리고 영업을 잘 한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2005년 즈음, 회사는 다른 GA들처럼 대리점 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영업부의 구성원들은 회사의 대리점 코드를 공유할 뿐이었고, 영업본부장은 각자가 ‘소 사장’이었다. 때문에 회사의 성장은 ‘소 사장’들의 성장이었지 회사 자체의 성장은 아니었다. 회사의 방침이 본인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언제든 등을 돌리고 떠날 수 있었다. 이것은 손해보험 GA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생명보험 GA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때도 그랬다. 회사 업적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던 영업본부장 몇 명이 타 GA의 유리한 조건을 따라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났다. 그런 일은 전에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었다. 위기는 항상 기회를 수반한다고 하던가! 이 일을 계기로 이윤 대표는 회사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동차보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회사의 수익 구조를 장기보험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이 할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회사는 보험사에서 분급으로 나오는 수수료를 자체적인 자금 조달을 통하여 선급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당시 회사는 자체적으로 수수료 선지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자동차보험의 수수료 마진으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죠. 그런데 장기보험에 대한 수수료를 선지급한다고 하자 여기저기에서 장기보험 업적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우리회사가 장기보험을 처음 시작하던 첫 달의 회사 목표가 영수보험료 기준으로 200만원 이었을 겁니다.”
현재 <프라임에셋> 소형 지사 수준의 업적이다. 그러나 ‘200만원의 영수보험료’라는 이 작은 시작이 오늘의 창대함을 가져오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지금은 수수료 선지급이 보험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방식이지만, 당시만 해도 보험사는 대리점을 믿지 않았고, 대리점은 FC를 믿지 않았다. 때문에 장기보험 수수료를 분할로 지급받는 것에 대하여 대리점이나 FC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업계 사람들은 <프라임에셋>의 공격적인 수수료 선지급에 대하여 ‘리스크를 감당하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이라며 악의적으로 비방을 했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물론 리스크가 없지는 않았다. 소위 ‘먹튀 FC’로 인하여 적게는 몇백만 원에서 몇억 원까지 수수료를 떼이기도 했다. 그러나 <프라임에셋>의 매출은 항상 리스크 이상으로 성장하였다.
“매출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어요. 수수료 선지급을 위해서는 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야 했거든요. 거의 2년이 넘게 수수료 정산 때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는 전쟁을 치렀어요. 소위 말하는 흑자도산이라는게 뭔지 그 때 처음으로 감이 잡히더라고요. 사장님도 아찔했겠지만, 함께 돈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하는 저나 다른 영업본부장들도 수수료 지급일이 두렵긴 마찬가지였죠…”
즐거우면서도 힘든 시기였다. 단 한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프라임에셋>의 구성원들은 그 모든 어려움과 힘든 고통을 이겨내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고통분담을 거부하며 회사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윤 대표와 모든 것을(삭제) 함께했던 사람들은 허연희 이사처럼 분명한 성공을 거두었다.
허연희 이사에 대하여 코멘트를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이윤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의 사정과 상관없이 본인의 영업이익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있어야 영업부의 이익이 존재한다며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사람이 있지요. 허연희 이사님은 후자의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회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때때로 제가 영업정책을 잘못 짜서 영업부에 혼선이 발생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장 제 방에 들어오셔서 신중하지 못한 저의 행동을 나무라시며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호통을 치셨어요. 대표인 저에게는 항상 변함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내시지만 제가 조금이라도 일을 잘못하면 대뜸 불호령을 내리는……, 제가 회사에서 가장 많이 의지하는 큰 누님 같은 분이지요.”
회사의 대표가 큰 누님같이 의지한다는 허연희 이사.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장님이 쉬운 말로 나를 의지한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단지 성장에 대한 신념과 뚜렷한 경영철학을 가진 사장님을 따랐을 뿐이에요. 다른 GA들처럼 소수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GA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열정이 정당하게 보상받는 GA를 만들겠다는 그분의 경영철학을 공감했기에 따를 수 있었던 거죠. 개인과 회사는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프라임에셋>은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녀는 현재의 <프라임에셋>을 ‘비전을 공유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우리 회사는 다른 GA처럼 소수의 영업관리자들이 독점적으로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영업관리자가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개방되어 있어요. 때문에 스스로의 열정과 노력만 있으면 그에 대한 보상은 누구나 성취할 수 있지요.”
회사의 시스템과 장점을 기자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녀. 결국 언제 문 닫을지를 고민하던 이름없는 GA의 TM실장은 회사와 함께 성장을 이루었고, 어느덧 국내 최고 GA의 영업이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며, 일반 직장인들보다 훨씬 행복(!)한 연봉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요행과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회사에 자신의 삶을 걸고 도전을 한 결과였다. 덕분에 그녀는 회사 내에서뿐만 아니라 GA업계에서도 인정받는 관리자가 되었고, 본인은 ‘평범한 아주머니’라고 이야기하지만, 주변으로부터 ‘능력 있는 아주머니’ 소리까지 덤으로 듣게 되었다.
“당장의 이익을 쫓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장기적 투자를 <프라임에셋>에 한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재테크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지금의 자신을 겸손하지만, 자랑스럽게 내비치는 그녀는 후배들에게 ‘증원은 확률 게임’이라고 얘기한다. 많이 만나고 많이 움직일수록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녀는 항상 마음 속에 새기며 실천을 했다. 지금도 그녀는 지사를 개척하기 위하여 지방의 특정 대리점을 방문할 때, 그 지역의 더 많은 대리점을 일일이 돌며 시간대별로 약속을 잡고 움직인다. 그 결과 단일 본부의 자동차보험료 거수액이 월 10억 원 단위까지 올라갔다. 그녀는 또한 차별화된 전략과 전문화된 영업을 추천한다. 홈쇼핑이나 온라인 다이렉트, 방카슈랑스 때문에 FC의 수입이 줄게 될 것이고, 결국 FC의 정착률이 하락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녀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공부하면 틈새시장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재물성 보험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예를 들어 2011년부터는 노래방이나 고시원, 찜질방처럼 다중이용업소는 화재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영업허가가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보험 수요층이 지금보다 훨씬 두터워지게 되고, FC들에게는 새로운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거지요.”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보험상품의 트렌드도 바뀐다. 경제전반의 시장 흐름을 읽고 대처한다면 보험시장은 무궁무진하다고 그녀는 조언한다. 우리나라는 수입보험료 기준으로 세계 10위의 보험강국이다. 그런 보험강국의 나라에서 GA 업계 1위 자리를 지키는 <프라임에셋>의 위치는 무겁다. 무겁지만 자랑스러운 그 위치에서 더 높은 비전과 행복을 꿈꾸고 있는 허연희 이사. 이미 많은 부분에서 행복을 추구한 그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 진다.
2022년 현재
허연희 본부장은 50본부, 67본부, 122본부 세 개의 본부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