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2021년 7월 I 글_류상태 작가 I 사진_곽혜진 작가
윤성민 본부장이 입사 7년 만에 이룬 업적이다.
일산 백석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함박웃음으로 맞아준 윤성민 본부장과의 유쾌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행복의 기준은 몰입할 수 있는 일과 가족의 건강
윤성민 본부장은 자신이 어렸을 때 매우 이기적인 아이였다고 말한다.
“20대까지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어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프라임에셋에 입사하고 일을 하면서 성격 자체가 많이 바뀌었어요. 나만 잘되는 게 쉽지 않고, 팀원들과 협동해야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성격도 많이 유연해졌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긴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본부장과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강경일 지사장은 본부장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주었다.
“우리 둘은 성향이 비슷했고 그래서 자주 싸우기도 했어요. 또래 친구들과 어떤 놀이를 하면 항상 본부장과 제가 1~2등을 다투었지요. 본부장은 내기를 하건 뭘 하건 지기 싫어하고, 실제로 잘 지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제가 윤성민 본부장을 높이 사는 이유는, 꿈과 목표를 크게 가졌다는 점이에요. 설계사로 입사할 때부터 벌써 본부장을 목표로 하고 있었어요.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것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선택이었죠. 제가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보험 일을 선택한 것도 윤본부장의 조언이 컸어요.”
입사 전, 강경일 지사장은 외국계 대기업에 다녔고 이미 가정도 이루고 있었지만 윤본부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기꺼이 모험을 감행했다. 그렇게 어릴 적 어깨동무였던 두 사람은 함께 프라임에셋의 관리자가 되어 한 사무실에서 꿈을 쌓아가고 있었다.
윤본부장에게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20대 때는 경제적인 수입이 성공의 기준이었어요. 지금은 수입은 어느 정도 기준만 충족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제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가족과 건강하게 사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30대 중반의 윤성민 본부장은 아직 미혼이다.
그가 말한 가족은 부모님과 동생 윤창민 본부장이다.
좌절, 좌절, 거듭되는 시행착오
휴대폰 대리점 점장, 청과물가게 점원, 카페 점원, 청소업체 운영. 윤성민 본부장이 프라임에셋 입사 전까지 거쳤던 이력이다.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일들을 택한 이유는 자기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빨리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저는 30세 전에 꼭 자리를 잡고 싶었어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지요. 첫째는 나에게 맞는 일인가. 둘째는 미래성이 있는가.”
윤성민은 대학에 다닐 때 휴대폰 대리점에서 점장으로 근무했다. 약 3년 정도 일을 하면서 그는 5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목표 금액을 확보한 윤성민은 휴대폰 대리점을 그만두고 카페창업을 위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아침 8시부터 낮 12시까지는 홍대 부근에서 알바를 했다. 이어서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는 명지대 앞에 있는 핸드드립카페 매장에서 일했다. 힘들었지만 두 곳에서 일을 한 이유는 서로 다른 성격의 카페매장에서 장단점을 비교하며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6개월을 경험한 후 영업을 시작할만한 장소를 알아보았다. 성수동 등을 돌아다녔다. 그의 수중에는 모아둔 돈 5천만 원이 있었다. 하지만 만만하게 진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초기비용이 너무 높았다. 투자대비수익도 그리 높지 않았다. 미래성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그는 미련 없이 이 일을 그만두었다. 첫 번째 시행착오였다.
다음에 선택한 일은 청과물 판매였다. 그는 이 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경험해보고 싶어서 잠시 일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체험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하지만 차가 없는 상태에서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일을 오래 하기는 어려웠다. 몇 개월 경험한 것으로 만족했다.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성인이 되어 겪은 두 번째 시행착오였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 이제 청년 윤성민은 ‘나에게 맞는 일’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프라임에셋에 입사하기 1~2년 전이었다. 청소사업에 도전한 것이다. 청소사업동호회카페에 가입하여 글을 올렸다.
‘청소를 배우고 싶습니다. 가르쳐주실 분을 찾습니다. 체계적으로 잘 배울 수 있다면 급여는 받지 않겠습니다.’
서산에 있는 한 분이 연락을 해왔다.
‘마침 딸아이가 취업해서 서울에 가 있는데, 그 방이 비어있으니 거기 숙식하면서 일을 배워보겠습니까?’
짐을 싸들고 내려간 곳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 부부는 일찍 일어나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식사를 했다. 며칠이 지나고부터 윤성민은 그들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일어나 토스트를 구웠다. 이른 식사가 끝나면 바로 일을 나갔다. 업무량이 많았다. 창틀청소, 화장실청소, 곰팡이 제거 등의 일을 배웠다. 화장실 바닥에 타일을 붙이거나 교체하는 줄눈작업도 배웠다.
세탁기를 청소하는 일은 특히 어려웠다. 세탁기를 아예 분해해서 통 안 곳곳을 고압샤워기로 씻어내고 작업 후에 다시 조립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통돌이는 비교적 간단하게 작업할 수 있었지만 드럼세탁기는 구조가 복잡하여 매우 힘들었다. 조립 후 제대로 작동이 안 되면 물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 전체를 영상으로 찍어 공부해야 했다. 에어컨 청소도 초짜였던 윤성민에게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말에는 공장청소와 사무실 왁스작업 등의 일을 했다. 가끔씩 아파트 고층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창틀을 떼어서 닦아내고 다시 끼우는 작업은 힘도 들었지만 위험이 따라 늘 조심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면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샤워를 했다.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체질인 윤성민에게는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조금 마른 듯 크지 않은 체격을 가진 그는 고된 일을 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해 보였다.
일이 즐겁지 않았지만 책임감으로 견뎠다. 같이 일하는 동료 대부분은 조선족이었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힘들고 외로웠다. 하지만 고민을 나누고 의지할 데는 없었다. 사장은 타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서산에서의 경험은 거기서 마치기로 했다. 사장은 수고비라며 몇십만원 정도의 돈을 챙겨주었다. 숙식을 제공받는 것 외에 급여는 받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때 윤성민은 오직 배우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돈 욕심은 없었다고 한다.
8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주먹구구식으로 배웠기에 ‘이 정도면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다른 전문인에게 배워보기로 했다. 청소방법과 마케팅까지 가르쳐준다는 분을 만났다. 동생과 둘이 배우는 조건으로 수강료 5백만 원을 기꺼이 지불했다. 고객을 창출하는 방법, 광고하는 방법 등 마케팅 기법을 배웠다. 김포 일산 지역의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2~3주 정도 일도 배웠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락스가 눈에 들어가 위험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배우는 과정이 끝나자 윤성민은 알바로 모아두었던 돈으로 봉고차와 청소도구를 구입하여 동생과 함께 청소회사를 차렸다. 부동산중개업소를 방문하여 ‘입주청소를 전담하는데 도와주시면 소개비를 드리겠다’고 열심히 광고를 했다. 명함을 엄청나게 많이 뿌렸고, 차에도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다녔다. 업체 이름은 ‘감동클린’. 감동을 드리겠다는 뜻을 담았다. 열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당시엔 온라인영업이란 것을 몰랐다. 온전히 몸으로 뛰어야 했다. 주문이 몰리면 하루에 2~3군데를 청소해야할 때도 있었다. 둘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주문이 몰려왔다. 저녁 늦게까지 작업해도 일을 끝내기 어려운 날도 많았다. 부모님까지 오셔서 도와주시기도 했지만 몸이 견디지 못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직원을 증원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노력 대비 수익을 따져보아도 미래성이 없었다.
청소사업은 결국 7개월 만에 접었다. 세 번째 시행착오였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쉽게 그만두냐.’
‘너는 왜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여러 군데 눈을 돌리냐.’
‘너 또 그만둘 줄 알았다’
당시 청년 윤성민이 들었던 말들이다.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몸으로 하는 일 말고 영업쪽 일을 찾아보자!’
프라임에셋과의 만남은 그렇게 세 번째 시행착오 끝에 시작되었다.
프라임에셋을 만나다
다른 영업직도 많은데 보험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윤본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노력에 따라 성장가능성이 무한히 열려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부모님과 친구들의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을 설득하고 보험 일을 시작할 때 나이는 27살이었다.
영업에 대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사회에서의 첫 직장은 LG휴대폰 대리점이었는데 오직 자사 폰만 팔아야 했다. 반면에 다른 휴대폰 매장은 LG폰 뿐 아니라 SK폰과 KT폰까지 모두 팔 수 있었다. 그때, 한 가지 상품만 파는 것보다는 다양한 상품을 파는 것이 고객에게 컨설팅하기도 좋고 여러 면에서 유리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경험이 원수사가 아닌 GA를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
GA에서 보험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험카페에 보험영업을 배우고 싶다고 글을 남겼더니 프라임에셋 소속 어떤 지사의 FC로부터 바로 연락이 왔다. 춘천에서 군인들 상대로 개척영업을 하는 지사였다. 청소 일을 배우기 위해 서산까지 홀홀단신 내려갔던 윤성민이다. 일을 배우는데 춘천이라고 별다르랴. 오히려 지인들이 없는 곳이라 좋았다. 지인이 아닌 군인들을 상대하는 순수한 개척영업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열망이 아무 연고 없는 춘천으로 기꺼이 그를 이끌었고, 이렇게 프라임에셋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춘천에서는 하숙방을 얻어 생활하며 보험을 배웠다. 영업을 배우면서 설계사 자격시험도 준비했다. 자격증이 없어서 아직 정식으로 영업을 하지는 못했다. 옆에서 보험영업을 보고 배울뿐이었다.
지사의 동료들은 대부분 윤성민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들었다. 보험영업을 배우며 보험을 공부하는 시기였지만 보험의 기초 지식만으로도 해당 지사의 영업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보장성을 저축성으로 포장해서 설명하는 게 어찌 보면 사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회사의 준법감시팀과 리스크관리팀이 영업의 전반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일부 영업조직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나보다. 어쨌든 춘천에서 설계사자격증은 땄다. 정식 설계사로 등록을 해서 영업을 시작해야만 했지만 춘천에서는 싫었다. 춘천의 그 지사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설계사 윤성민은 춘천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과적으로는 네 번째 시행착오다.
설계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날 윤성민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동안 너무 지치기도 했고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춘천에서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GA에 대한 공부도 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GA는 모두 비슷하지만 오직 프라임에셋만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프라임에셋을 선택한 건 무엇보다 투명한 경영과 승격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투명하게 운영되는 곳이 거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윤성민은 프라임에셋의 여러 본부장을 만나보고 드디어 정식으로 입사를 결정했다. 영업62본부다. 임명호 62본부장은 보험신입 윤성민 FC를 안태수 지사장(현 156본부장)에게 배정했고, 안태수 지사장은 구민형 팀장(현 237본부장)에게 그를 배정하여 팀을 구성시켰다. 윤성민은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기 위해 강동사업단에 출근했다. 집이 상암동이라 거리가 꽤 있었지만 즐겁게 다니며 일을 배웠다.
영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뿐이었다. 막상 영업을 시작하자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보험에 대해 실전에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용어도 어렵고, 받아든 서류만도 몇 십장이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는커녕 기초개념조차 알기 어려웠다.
보험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처음에는 지인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성민은 지인상대 영업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인맥을 넓히기 위해 동호회모임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축구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어렸을 때 다니다가 그만두었던 교회청년회도 다시 나갔다.
그때는 대면 영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새벽에는 동대문시장, 아침에는 졸업한 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낮에는 음식점, 저녁에는 노래방을 돌며 하루 종일 영업에 매달렸다.
“당시 하루에 한 명 개척해서 계약하는 게 목표였어요. A4용지로 한 페이지짜리 소개장을 만들어서 돌리고, 가입하지 않아도 보험금청구를 대신 진행해드리겠다고 했어요.”
그의 말을 듣자 보험증권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있었다. 신입 설계사로서 내용 파악이 쉽지 않았다. 고객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증권을 가져가서 팀장의 도움을 받아가며 내용을 파악했다. 다음날 엑셀로 간단히 정리한 내용을 알려주고 보험금 청구도 대신해주었다.
보험금 청구를 대신해달라는 요청이 연이어 들어왔다. 임플란트를 했다는 어느 상인은 청구기간이 이미 지난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팀의 선배들에게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고 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상인이 주변인 여럿을 소개해주어 제법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꺾는 일도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어느 재래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왜 자꾸 와! 여기는 여자들 옷 갈아입고 해야 되니까 오지 마!”
소금을 뿌리며 소리치는 사람은 여성 옷을 파는 상인이었다.
“총각, 저기 좀 보라구!”
나물 파는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에는 은행대출, 중고자동차, 무언가를 사고판다는 등 온갖 전단지들이 쌓여 있었다.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일은 재미있는데 지속가능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두가 다 뜯어질 정도로 열심히 뛰었지만 발로 뛰는 영업에는 한계가 있었다. 밤낮으로 고민했다. 이런 식의 ‘개척’밖에 없을까, 다른 영업직으로 옮겨야 하나, 번민으로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보험영업에 처음 입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상황이지만 윤성민에게는 다섯 번째 시행착오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번민의 상황은 계속되었지만 어쨌든 열심히 한만큼 시간이 지나자 제법 실적은 나왔다. 하지만 몸으로 뛰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여름엔 셔츠가 젖을 정도로 뛰었고 겨울엔 벌벌 떨면서 일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며 윤본부장이 한 말이다.
‘영업의 중심을 인터넷으로 전환해보면 어떨까!’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온라인영업에 눈이 뜨이는 순간이었다. 설계사들이 모이는 인터넷카페에서 베테랑으로 느껴지는 사람들과 접촉했다.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당시 많은 조언을 해 주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소속은 다르지만 집과 지근거리에 살던 61본부 소속 김상현 팀장(현 188본부장)이었다. 주변 여러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온라인교육을 받아보기로 했다.
“저는 비싼 옷이나 차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지속가능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배우기로 마음먹었죠.”
적지 않은 돈을 기꺼이 지불하고 교육을 받았다. 블로그나 인터넷카페, 유투브 등 SNS를 활용한 인터넷영업비법을 석 달에 걸쳐 배우고 나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천만 원 넘게 찍었어요. 입사 11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였지요.”
그로부터 1년이 조금 더 지나 윤성민은 드디어 FC에서 팀장이 되었다. 입사한 지 꼭 2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팀장이 된 후에는 불과 3개월 만에 지사장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다시 1년 3개월이 지나 본부장이 되었다.
윤성민은 지사장으로 승격했을 때까지도 차 없이 맨발로 뛰었다고 한다. 지사장이 되고 나서야 아반떼를 샀다. 경차를 사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위험하다고 말려서 아반떼로 샀단다. 본부장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 그 차를 타다가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동료들의 권고로 작년에 벤츠로 갈아탔다.
열심히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지는 않더군요
윤본부장의 193본부는 비대면 온라인영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성장가능성이 크고 무한하며 계약률이 높아 신입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DB영업, 산모교실 등 여러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
193본부는 이미 두 개의 자본부를 분할했다. 자본부 분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분할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분할이 새로운 성장의 계기가 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와 함께 일했던 분들은 대체로 오래 일하는 편이에요. 고락을 같이 하여 지사장, 본부장까지 승진한 후배들을 보면 가슴이 뿌듯해요.”
하지만 뒤처지는 동료도 있게 마련이다.
“성장하지 못하는 후배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해요. 저를 믿고 따라온 후배인데, 미안한 마음도 들고요.”
하여 관리자가 된 후 그의 중요한 목표는 동반성장이 되었다. 영업시장을 구축하지 못한 후배에게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해 알려주기도 했고, 동반성장을 위한 룰을 만들어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다.
“저는 팀원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때 말로만 하지 않아요. 제가 먼저 직접 실행하고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갈등이 생겼을 때는 팀원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해봐요. 그리고 면담을 통해 해결점을 찾지요.”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적이나 승격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문제에 관해 윤본부장은 이렇게 원인을 분석했다.
“팀원들 간의 인간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성격도 중요하구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해요. 후배가 먼저 성장할 때가 있는데 그걸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어요. 시기하기보다 축하해주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조건들이 갖춰져야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고 모두가 다 성공하는 건 아니거든요.”
193본부의 주요 리쿠르팅 전략에 대한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회사는 워낙 탄탄하고 모범적인 회사입니다. 그 자체로 플러스 요인이죠. 거기에 더해서 193본부의 장점이나 성공사례를 보여줍니다. 저는 수수료보다 성장요인, 비전, 투명성,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들을 강조하고 활용하지요. 그리고 최근 우리 본부의 신입사원들의 평균 수수료율 등 데이터를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그게 신뢰를 준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몰입, 인큐베이터
193본부 팀원들은 신입FC 교육실을 ‘인큐베이터’라고 불렀다. 인큐베이터라면,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주고,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키워내는 곳이 아닌가.
193본부는 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윤본부장은 롤모델이 있느냐는 질문에 개그맨 유재석씨를 지목했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유재석씨는 한결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분명히 고난과 역경도 있었을 텐데, 그런 어려움과 슬럼프를 잘 극복하고 긴 기간 동안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 점이 설계사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의 경험과 확신은 곧 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신입이 들어오면 3~4주 정도 기본적인 교육을 해요. 교육할 때마다, 저는 실적보다 예의를 먼저 강조하지요. 에티켓을 갖추지 않으면 적이 많이 생기고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어렵거든요.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인사하는 것 등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다지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워요.”
그는 자신도 신입 FC의 인격을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한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을 할 때는 엄격하다. “저는 신입교육을 엄격하게 하는 편이에요. 교육을 받으면서 우는 친구들도 많아요.”
혹독한 교육과정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신입자들이 유능한 FC로 성장한다고 팀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인큐베이터의 미숙아가 건강한 아기로 자라듯이.
윤본부장은 입사 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물론 당시에도 관리자에게 기초적인 영업방식을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온라인영업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지금 그가 갖춘 노하우는 거의 혼자 발로 뛰며 193본부에 맞게 최적화 한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이른바 ‘인큐베이터’를 통해 철저하게, 그리고 아낌없이 다 가르쳐주고 있다.
“짧게는 한 달 내로, 길게는 6개월 내에, 신입자는 거의 예외 없이 좌절감과 한계를 느낄 때가 와요. 저는 그때마다 저의 경험을 얘기해주었고, 진솔하게 상담하고 독려해주려고 노력했어요. 함께 고비를 넘기 위한 개인적인 조언과 도움을 지속적으로 주는 거지요. 그때 그 고비를 넘기면서 크게 성장한 동료들이 꽤 있어요.”
“나만의 비법으로 10%는 남겨두고 90%를 가르쳐주는 장인들이 많은데, 윤본부장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100% 다 알려주었습니다. 영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저를 넘어서서 더 잘하는 후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인큐베이터를 개방하는 건 아니란다. 의지가 있는지, 가르치면 충분히 성장할 만한 사람인지는 먼저 살펴본다. 하여 인큐베이터 과정을 견디고 통과한 신입들은 80% 이상 정착했다.
윤성민과 프라임에셋
윤성민 본부장은 올해 프라임에셋 본부장 MVP에 선정되면서 영업이사가 되었다. 제일 먼저 영광과 기쁨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가족이라고 답했다. 부모님과 동생인 윤창민 본부장이다.
“제가 지사장으로 있을 때 동생에게 입사를 권했어요. 동생이라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지요. 동생이라고 해서 특혜를 주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건데 그래도 하고 싶으면 오라고 했어요. 들어오더라고요. 시험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한 번에 붙었어요. 과정을 거치고 영업을 하는 걸 보니 꽤 잘하더군요.”
기대 이상으로 성장한 아우는 자본부로 분할하여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있었다.
가족 다음으로 기쁨을 나누고 싶은 사람으로는 강경일 지사장을 꼽았다.
“강경일 지사장은 외국계 대기업에 다니다 과감히 도전을 선택한 저의 런닝파트너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죠. 그는 학구파였고 저는 공부하는 걸 싫어했어요. 공부하는 그를 매일 불러내서 PC방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당연히 그 친구 부모님이 저를 싫어하셨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그러면 강경일 지사장이 보는 윤본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동료로서 보는 본부장의 모습은 한 마디로 프로였어요. 제가 입사할 때는 신임본부장이었지요. 사실 친구니까 좀 더 잘해주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에누리 없이 동등하게 대해 주었어요. 동료들 가운데는 제가 본부장의 친구라는 걸 몰랐던 사람들도 많았어요. 다른 신입동료들과 똑같이 교육받고 관리를 받았으니까요. 그런 면에서도 윤성민 본부장은 프로였던 거죠.”
그는 윤본부장과 193본부가 빠르게 성장한 요인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가 프로의식, 둘째가 최전선에서 신입사원들을 관리해주는 부분, 셋째는 목표가 높다는 점을 들고 싶어요. 제가 만약 본부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급여 5백만 원, 또는 천만 원 정도에서 만족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본부장이 앞서 달리면서 그 이상으로 저를 성장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저의 수입은 5년 전 직장에서 받던 월급과 상당히 차이가 나요. 그런 점에서 본부장은 저의 좋은 런닝메이트였다고 생각해요. 윤본부장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앞서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목표를 높게 잡고 결국 이루어냈지요. 이제 그 끝이 어딘지, 어디까지 갈지 저도 궁금해요.”
프라임에셋은 올해 본부장 퇴직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재직 중 본인이 분할한 자본부의 성과에서 발생하는 분할수당을 본부장에게 평생 지급한다는 조항이다. 물론 윤본부장에게도 적용된다. 그에게 먼 훗날 회사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산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직 퇴직을 한다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못해봤고요. 쉬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50이 넘어서 운동이나 취미, 여행 등 안 해봤던 경험들을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는 자신이 프라임에셋의 많은 사람들에게 롤모델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롤모델이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단지, 제 강의나 조언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말하는 후배들이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보람을 느껴요”.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지, 다른 경쟁업계의 스카웃 제의는 없었는지 등을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수많은 시챙착오 끝에 정착한 프라임에셋은 저의 직업적 첫사랑이에요. 돈 때문에 쉽게 옮기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우리 회사는 시스템을 대단히 잘 만들어놓았어요. 웬만해선 옮길 이유를 못 느끼지요. 그래서 제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이고 신입들에게도 분명한 비전을 주는 회사라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를 모방 하려는 다른 GA도 있어요.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 회사의 밸류체인은 분할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이익을 공유하는 시스템인데 다른 GA는 이러한 제도를 흉내조차 낼 수 없거든요. 어쨌든 그들이 자기 소득을 극대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우리 회사처럼 가치를 공유하는 제도를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업193본부, 관리자 회의
2021년 4월 27일 오전 11시, 193본부 회의실에서 관리자회의가 열렸다. 윤본부장과 지사장 9명이 모인 자리에서 윤본부장은 15분 동안 강의를 했고, 이어서 50분 정도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는 윤본부장이 제시한 주제에 대한 의견교환과 건의로 이루어졌다.
윤본부장의 강의가 이어지는 동안 프리젠테이션은 각종 통계자료와 인상적인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초로의 남성이 햄버거 가게에서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계산대에는 종업원 대신 자동판매기가 놓여있다. 그리고 자막에 이런 문구가 담겼다.
“햄버거는 먹고 싶은데 주문을 어떻게 하지?”
윤본부장은 참석한 지사장들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25세 이하는 졸업장 싸움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실력싸움입니다.”
강의에 이어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윤본부장은 의견을 많이 듣는 스타일이었다. 자신의 견해를 먼저 제시한 후 충분히 의견을 듣고 동의를 구한 후에 사안을 결정하였다. 의견이 팽팽할 경우에는 거수로 결정하기도 했다. 지사장 한 명이 영업가족과의 일대일 면담이 꼭 필요한 것인지 물었다. 윤본부장은 이렇게 답했다.
“팀원관리에서 일대일 면담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말도 했다.
“팀원은 관리자를 따라갑니다.”
신입들은 인사하는 태도나 심지어 표정과 말투까지 은연중 자신의 관리자를 닮는다는 것이 윤본부장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회의가 끝난 후 참석한 지사장과 인터뷰를 했다.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윤본부장은 말보다 행동을 늘 강조하는 것 같은데, 혹 그에게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를 보신 적은 없었습니까?”
“그는 먼저 행동을 하고 말을 합니다.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말을 먼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강대훈 지사장이 필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윤본부장의 강의는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 중간에 적절한 유머를 섞어 청중을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말하는 속도가 빠른 윤본부장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다. 속도가 빠른 건 장점일 수 있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자주 강의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만큼 정확한 발음을 연습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필자 후기
인터뷰와 집필에 대한 의뢰를 받고 나서, 필자로서 세운 기준이 있었다. 팩트를 넘어서는 미화는 하지 않겠다는 것과, 인터뷰 대상자나 회사의 단점 또는 문제점이 발견되면 망설이지 않고 글에 담겠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단점을 고쳐서 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회사의 요청사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본부장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단점이나 문제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경제문제에 문외한인 필자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윤본부장이 또래 젊은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스펙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필자가 만난 윤본부장은 프라임에셋 MVP본부장이라는 이력을 빼고 나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터뷰어로서, 윤본부장과 대화하면서 느낀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윤본부장은 또래 젊은이들이 넘보기 어려운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소득 수준으로 볼 때 상위 1%에 들지 않을까. 그런데 돈을 멋지게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윤본부장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꼰대짓을 하는 것 같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세상에는 얻은 권력이나 번 돈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이 그걸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본인 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 전체가 함께 휘청거리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재미있고 의미 있는 미래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등 성공한 사업가들을 연구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번 돈을 어떻게 멋지게 쓰고 사는지…”
어설픈 조언에 윤본부장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중요한 문제 같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87년생인 윤성민 본부장이 청년기에 경험한 네 번의 시행착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배움에 대한 갈증을 통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했던 그의 열정은 삼십대 중반의 윤성민을 회사의 롤모델로 자리잡게 했다. 또래 친구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청년 윤성민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성장은 결코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영업의 한계를 그는 수수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고, 선배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해법을 찾아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필자는 시간이 흘러 그에게 성숙과 지혜가 더해지면서 그의 성공 스토리가 프라임에셋에서 잠시 일회성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늘 꿈꾸는 롱런하는 삶,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기준이 되기를 소망한다. 수많은 동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디딤돌과 같은 그런 역할 말이다.
[촬영일자: 2020년 10월 8일]